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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 현대사

8.15 광복의 외적인 배경 - 1. 미국의 시각

by 취미와 문화 2021.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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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과 좌우익 세력의 갈등 - 8.15 광복의 배경]

 그 이전까지의 경과 ) 2차 세계대전 발발 - 파시즘 대 반 파시즘 구도

  -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

  - 1940년 9월 독일-이탈리아-일본의 3국 동맹 공식화.

  -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 발발.

  - 파시즘(일본, 이탈리아, 독일) 대 반파시즘 구도의 형성

 

 미국의 시각) 동아시아 전선에서 미국의 정국 주도

   - 대공황기 이후 세계질서 유지에 노력하기 시작한 미국은, 일제의 대륙진출을 주시하고 있었음.

   - 가능한 일본과 전쟁을 꺼렸던 미국은, 1930년대 중반까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고는 있었음. 1933~1936년에 서울에서 미-일 외교관계 하 서울주재 총영사로 근무하다가, 1940년대 초 태평양전쟁기에 국무성 내 극동국 및 외교정책자문위원회 내 영토소위원회 등에서 일했던 랭던(William R. Langdon, 국무부 극동국 관리*)의 보고서가 대표적인 예.

       * 미합중국 국무부 극동국 : 미합중국 국무부는 미국정부에서 외교 정책을 담당하는 중앙행정기관이다. '극동'은 러시아 동쪽 끝 지방까지를 포함하고, 동아시아~동남아시아를 섞어 부정확하게 지칭하는 용어이다. 극동이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중국~한국~베트남 등을 포함하는 동아시아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위키백과:"미합중국 국무부", "극동")

  - 당시 미국은 대개 일본에 대하여 대항하는 이들 중 '사회주의' 세력을 두려워했고, 미 외교관들은 식민지 한국 문제에 있어서 대개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다. 외교관들은 한국인들을 대개 '수동적이고 무능력'하다고 보았다. 다만 미국이 필리핀 식민지 운영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 일제의 통치 방식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하긴 했지만 결국 지배하는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 미국이 식민지 해방과 독립을 처리하는 주도자로 나서게 된 시기는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습 전후로 보인다. 미국이 한반도 해방 문제를 다루는 것은 물론 동아시아 질서 재편 과정에 대응하는 선상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태평양 전쟁 이후로 민족운동가들의 활동이 다시 활발해지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재미 한인세력도 임시정부 승인과 한인 무장단체에 대한 군사지원을 위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미국의 입장에서도 미-일 간 관계가 나빠지면서, 새로운 정보원으로서 해외 한인세력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한국 문제 처리에 있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인들을 대표한다고 보지 않았다. 해외 한인세력들이 임정을 승인해달라 요구했지만, 공식적인 미국의 지지는 없었다.

  - 랭던은 1940년대 초반 국무성 내 극동국에 근무하면서 재미 한인들, 중경 주재 미 대사관 등 정보원들을 통해 임정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1930년대 한국에서의 경험이 인정되었던 것인지, 미국의 전후 대한정책 구상과 관련된 실질적인 업무에도 참여하면서 '한국통'으로 인정받았던 것 같다.(김지민, p.163) 

  - 그런 배경 아래 랭던은 1942년 2월에 <한국 독립문제의 몇 가지 측면들>(소위 '42년 보고서')이라는 문건을 작성했다.  

미 국무부 극동국 국장 해밀턴

국무차관 웰즈, 차관보 벌, 외국인활동관련국 부조정관 호스킨스 (참조) 미상

1942년 2월 23일

 이 문건에 “한국독립문제의 몇가지 측면들”(Some Aspects of the Question of Korean Independence)이라는 주제로 극동국(FE)의 랭던씨가 작성한 비망록(1942. 2. 20)을 첨부합니다. 특히 한국과 관련된 업무를 처리하는 관계자들이 중요하게 고려할 가치가 매우 높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비망록이라고 생각됩니다.

극동국 국장 해밀턴

(중략)


Ⅱ. 한국인의 對日감정

(중략)

   일본으로부터 지금까지 거부당해왔던 시민권을 얻어 일본의 신민으로 남아 있든지, 아니면 독립을 원하든지, 둘 사이에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한국인들은 아마도 만장일치로 독립을 원할 것으로 확신한다. 과거 독일과 러시아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 청년들은 학교, 대학, 여러 청년단체에서 집중적으로 세뇌교육을 받아 일본과 일본방송에 동정적일 것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다고 말할 수 없다.

 한국의 젊은이들도 나이 먹은 사람들만큼이나 한국이 그들의 조국이지 일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요즘 몇 년 사이에 경제가 좋아졌기 때문에 독립을 통한 갑작스런 혼란을 원하지 않을 것이란 주장들이 있으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본인은 확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은 상대적 번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일본을 살찌우고 있는 한국의 자원, 부, 기회에 대한 완전한 소유를 원하기 때문이다.

Ⅲ. 한국독립 문제
 비록 투표를 통해 독립을 결정한다면 한국인들이 만장일치로 독립을 선택할 것이 분명하지만, 한국의 경우에 독립은 많은 실질적인 어려움과 고려사항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정치, 군사, 경제 분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 정치적 난관
 37년 동안의 일본의 지배는 한국민들을 정치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오랫동안 중앙 및 지방 정부, 외교, 법원, 법, 경찰, 금융, 은행, 교육, 통신과 해운 등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독립이 된다고 해도 한국인들은 국가를 운영할 경험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3) 경제적 난관

 행정의 경우에서처럼, 일본인들은 금융업, 기계제조업, 공학, 수출입, 대량유통, 해운 부문 등의 모든 경제영역에서 한국인들을 배제해왔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근대경제에 대한 훈련이 되어있지 않다. 더 나아가, 한국 경제는 철저히 일본의 경제에 편입되어 있고, 한국의 특산물, 특히 한국경제의 버팀목이자 가장 중요한 환금작물인 쌀은 일본에서 시장경제를 향유하고 있고, 일본에서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한국경제를 일본경제로부터 분리한다든지, 경쟁상대로의 구조조정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경제를 위해 근본적으로 건전한 경제적 토대 또한 있다. 이웃나라들은 한국산 쌀이 없으면 지속될 수 없으며, 한국의 쌀은 아마도 다른 나라들로부터 들어온 수입품 대금을 지불하고도 남을 정도로 충분하다. 한국의 광산에서 나오는 金은 매년 5천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데, 아마도 미국이나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 불균형에서 나오는 손실을 해소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한국인들은 그 누구보다 더 탁월하게 금을 채취할 줄 알며, 금생산은 일본의 도움이 없어도 거의 현재의 수준에서 계속될 것으로 보여진다.

 한국인들의 정치적 경험부족과 무방비 때문에 한국인들이 우선 그들의 나라를 어떻게 운영하고 재침략으로부터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더욱이 적어도 한 세대동안 한국인들은 열강으로부터 보호, 지도, 그리고 근대국가로 나아가는 데 대한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한국인들은 똑똑하며, 매사에 빠르며, 기꺼이 배우려고 하며, 진보적이고 애국적이다. 만일 사심이 없는 보호와 지도 그리고 도움이 주어진다면 한국인들은 한 세대 안에 그들 스스로 설 수 있으며 세계의 번영과 진보에 기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Ⅳ. 독립절차에 관한 제언

 한반도내에서 현재 그 어떠한 구체적인 독립운동을 찾거나 그것에 의지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일본경찰의 강력한 감시체제 아래에서 그러한 독립운동은 조직될 수도 없고 효과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독립을 위한 준비는 해외에서 조직되어야만 하며, 그 조직과 한국내 지도자들과의 연계가 성립되어야 한다. 독립을 위한 조직이 만족스러울 때 즉 그 조직이 자신들을 돕는 후원정부를 만족시킬 필요가 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그 조직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최대한 대표성을 확보하고

 ② 한국내 명망 있는 지도자들-이들은 한국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지도자들로-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③ 상당한 추종자들을 확보하고 있으며

 ④ 스스로를 도울 준비 및 능력이 있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연합국의 대의를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시기가 올 때, 도움을 주는 후원정부는 연합국의 전쟁목적의 하나로서 한국의 독립을 선포하는 문제와 그 조직을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인정하는 문제에 대하여 미국, 영국, 중국 및 소련정부와 상의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과 소련은 특히 한국독립의 실제적인 측면들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독립을 위한 그 어떠한 계획도 그 나라들로부터의 승인은 필수적이다. 물론 그 계획에 대해서 그 두 나라가 아닌 제3의 정부가 후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연합국이 승리한 다음에, 그 임시정부는 한국에 수립될 것이며, 헌법을 채택하고 제헌정부를 구성하는 동안 국제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국가를 통치할 수 있다.

 후원국 정부들은 처음부터 그 국제위원회가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만 하는데, 국제위원회의 기능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질 때까지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국제위원회의 기능이 필요하지 않다는 결정은 한국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후원국 정부들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적어도 중국이나 영국으로부터 동의없이 서둘러서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다든지 한국의 어떤 재야단체를 한국의 임시정부로 선언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확실한 승리가 보장되기 전에는 한국의 독립을 약속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직접 관할했던 점령지들로부터 일본에게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아시아의 한 민족에게만 독립을 약속한다면 한국의 대의명분에 해를 끼칠 따름이며, 일본과 그 동맹국들에게 웃음꺼리만 제공하며, 그리고 우리 우방국들을 불편하게 만들 따름이다.

 
    Ⅴ. 독립 이전의 임시적 조치

1) 정치적 조치

 현재도 그러하지만 앞으로도 한국의 일부 그룹은 우리에게 졸라댈 것이다. 한국독립에 관한 우리의 입장에 대한 정확한 태도표명과 어떤 특정한 그룹을 한국의 임시정부로서 인정할 것에 대한 요구 등이 그것이다. 우리가 굳이 독립에 대한 그들의 희망을 막을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이런 일들에 성급하게 어떠한 약속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상황이 보다 확실해질 때까지 피정복민족의 자유라는 보편적 문제와 관련되는 국가정책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특정 그룹을 언급하는 것 이상의 범위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는 1941년 8월 14일,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영국과 미국의 공동선언 가운데 세 번째 원칙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즉, 우리는 “모든 국민이 그 속에서 영위할 정부형태를 선택할 권리를 존중한다는 것”과 그리고 우리는 “강압적으로 빼앗겼던 주권과 자치정부를 인민들이 다시 찾는 것”을 희망한다는 조항이다.

(후략) 
밑줄 : 취미와 문화

 

  '한국통' 랭던의 보고서는 미국 정부가 한국에 갖는 인상에 대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일본의 패전과 해방, 그리고 그 이후 미군정 시기까지도 한국인에 대해 미국이 이렇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즉, '한국인들은 스스로 행정, 정치, 경제 등을 꾸려나갈 역량이 없다'는 시각으로 한국인들을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한반도가 지리적으로 미국 입장에서 그렇게 핵심적이고 중요한 부분이었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뭐라 확답을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이때까지는 일본에 대항하는 전진기지 격이 한반도라고 인식된 것 같다. 한반도가 서둘러 독립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일본과 그 동맹국에게 웃음거리가 되거나, 미국의 동맹국에게 불편을 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 것을 보면 말이다.

 

* 참고자료

김지민, <해방 전후 랭던의 한국문제인식과 미국의 정부수립 정책>, <<한국사연구>> vol.2002. 한국사연구회, 2002.

36. 미국 국무부내 관계자들의 한국관련 정보 공유와 관련한 서신, 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ij_020_0020_00360, 2021-01-05.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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