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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33

8.15 해방의 배경 - 2. 한국의 저항 [군사활동] *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 1. 1919년 대한민국 육군임시군제 : [상비병]과 [국민병]의 구분, 상비병은 현역과 예비역으로 나눔, 참모본부, 대본영, 총사령부, 지방사령부, 육군무관학교 등 군무부 조직과 직무를 8개조 29개 항으로 명문화 하였음. 2. 1920년 교령 제 6호 대한광복군 총사령부 규정 급동세칙 3. 1920년 군무부령 제1호 임시군사주비단제 : 국내에서 단원모집과 군수품 확보 및 모험 공작을 위한 [주비단]과 전쟁 준비 태세를 갖출 방편으로 [의용단]을 조직함. * 중국 국민당 측 1. 중국군관학교 뤄양분교 한인특별반 설치 : 1932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 의거를 계기로 장제스가 설치 2. 한인특별반을 지청천과 이범석이 주관하여 사관생도 양성 [한국 광복군.. 2021. 1. 6.
8.15 광복의 배경 - 1. 미국의 입장 [8.15 광복과 좌우익 세력의 갈등 - 8.15 광복의 배경 ; 1. 미국의 입장] 그 이전까지의 경과 ) 2차 세계대전 발발 - 파시즘 대 반 파시즘 구도 -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 - 1940년 9월 독일-이탈리아-일본의 3국 동맹 공식화. -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 발발. - 파시즘(일본, 이탈리아, 독일) 대 반파시즘 구도의 형성 미국의 시각) 동아시아 전선에서 미국의 정국 주도 - 대공황기 이후 세계질서 유지에 노력하기 시작한 미국은, 일제의 대륙진출을 주시하고 있었음. - 가능한 일본과 전쟁을 꺼렸던 미국은, 1930년대 중반까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고는 있었음. 1933~1936년에 서울에서 미-일 외교관계 하 서울주재 총영사로 근무하다가, 1940년대 초 .. 2021. 1. 6.
[1970년대 원주 민주화운동] 서론 - ‘계’의 전통과 '봉건성'(2) [1970년대 원주 민주화운동] 서론 - ‘계’의 전통과 '봉건성'(2) (* 본 연재물은 전적으로 취미와문화의 생각이 반영된 것으로, 충분히 비판 받을 수 있는 문서입니다. 아직 거친 아이디어 수준이기에 여러 비판이 필요한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은 농민 운동가들의 ‘농촌 사회를 민주화시킬 것’이 라는 의욕을 돋웠다. 그들은 민주화를 추진하고 현존하는 권위주의에 저항하기 위 해, ‘권위적인 것’을 규정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현존하는 권위주의의 악 덕을 역사 속 전근대적 ‘악습’들에서 찾아내었다. 가령, ‘동계(洞契)’는 1960년 대부터 ‘전근대적인 것’으로서 협동 조합론의 도전을 받아왔던 공동체였다. 사실 동계는 주민들 간 관계를 대변할 뿐이지, 그것의 존재함으로써.. 2021. 1. 5.
8.15 광복의 외적인 배경 - 1. 미국의 시각 [8.15 광복과 좌우익 세력의 갈등 - 8.15 광복의 배경] 그 이전까지의 경과 ) 2차 세계대전 발발 - 파시즘 대 반 파시즘 구도 -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 - 1940년 9월 독일-이탈리아-일본의 3국 동맹 공식화. -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 발발. - 파시즘(일본, 이탈리아, 독일) 대 반파시즘 구도의 형성 미국의 시각) 동아시아 전선에서 미국의 정국 주도 - 대공황기 이후 세계질서 유지에 노력하기 시작한 미국은, 일제의 대륙진출을 주시하고 있었음. - 가능한 일본과 전쟁을 꺼렸던 미국은, 1930년대 중반까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고는 있었음. 1933~1936년에 서울에서 미-일 외교관계 하 서울주재 총영사로 근무하다가, 1940년대 초 태평양전쟁기에 국무성 .. 2021. 1. 5.
충주 선사 유적 박물관 충주 선사 유적 박물관 Ⅰ. 개관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早洞里)에 위치한 충주 선사 박물관은 중원지역 선사 시대의 유물들을 주로 전시한 박물관으로, 단양 수양개, 청원 두루봉 흥수굴, 충주 조동리 등 유적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된 유물 중에는 충청북도 시도기념물 126호 조동리 유적을 중심으로 소개되어 있다. 조동리 유적에서는 중원문화권(中原文化圈)의 중심에 위치한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지층이 발견되어 연구가 진행된 바 있다. 조동리 유적은 1990년 9월 10일 집중 호우 시 충주댐 수위조절로 인한 거세진 물살의 영향으로 인해 퇴적층이 깎여나가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하지만 유적은 다시 경작지 복구로 인해 덮이게 되었고, 1996년에서야 조동리 제방 공사 이전에 구제 발굴이 실시되었.. 2021. 1. 1.
[지역사] 삼척 원주교구 관련 구술 - 김일동 전 삼척시장, <<삼척의 구술현대사 2>> [지역사] 삼척 원주교구 관련 구술 - 김일동 전 삼척시장, * 김일동 전 삼척시장(1938~) : 삼척중학교, 삼척공업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철학과 중퇴,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 삼척상공회의소 회장(6~9대), 죽서문화제(현 정월대보름제) 위원장(8~12, 16~17회),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삼척시 공동대표, 제13대 국회의원, 통일민주당 사무부총장, 삼척시 민선시장(1~3대), 2002 삼척세계동굴박람회 조직위원장. 김일동 자서전도 존재하는 것 같다. [김일동, ] * 채록자 1. 임관혁 : 관광학 박사, 전 가톨릭관동대학 교수, 지역공동체 네트워크 상임이사 강릉 영동대학교 교수 2. 구완회 : 관광학 박사, 현 (주)커뮤니티워크 대표 * 삼척은 가톨릭 원주교구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 1970년대.. 2020. 12. 31.
삼국의 정치적 발전 [삼국과 가야의 발전(7) - 삼국의 정치적 발전] * 삼국의 정치적 발전 앞서 조금씩 다루어왔듯이, 고구려와 백제는 4~5세기 사이에 계속 서로 투닥거렸습니다. 4세기에는 백제에 근초고왕이라는 왕이 있었고, 4세기 말부터 5세기까지는 고구려에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한반도와 만주벌판에서 크게 위세를 떨쳤죠. 그리고 6세기에는 신라가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삼국 각각의 발전상을 찬찬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2020. 12. 13.
삼국의 고분 양식에 대하여 [삼국과 가야의 발전(6) - 삼국의 고분 양식에 대하여] * 삼국의 고분 양식 각 나라의 무덤 양식은 해당 나라의 문화를 알려주는 주요 단서입니다. 그 이유를 몇 가지 들자면, 그저 시신을 묻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귀하게 여기고 있는 물품까지도 함께 무덤에 넣어놓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무덤 모양은 왜 이렇게 만들었고, 왜 이런 물건들을 넣어놓았는지 당시 사람들이 굳이 언어로 기록을 남겨두지는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조상님들 묘지가 왜 그런 모양인지 굳이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무덤만큼은 참으로 그 당시로서는 당연한 전통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지금 그나마 남아있는 거대한 무덤들은 당시 유력한 이들의 무덤일텐데, 그렇다면 그 당시에 향유하고 있던 문화의 양상을 무덤을 통해 엿볼 수 있는.. 2020. 12. 10.
4세기 이전 금관가야(구야국) 주도의 변한 [삼국과 가야의 발전(5) - 4세기 이전 금관가야(구야국) 주도의 변한] * 전기 가야 연맹 한반도 중부에서 남부까지 위치한 마한-진한-변한이 삼한이라고 했지요. 삼한지역에 마한은 목지국을 중심으로 강성하고 있다가, 기원전 1세기에 마한에 백제국이 들어서서 목지국의 주도권을 빼앗아오게 된다고 했지요. 그리고 진한과 변한은 서로 경쟁하면서 교류를 하고 있었지요. 그 중에 4세기에 한사군 낙랑군 등이 제거되고, 무역 파트너를 잃은 변한 지역은 위기를 겪게 되고 여러 소국들이 변한 구야국(금관가야)을 침략했던 '포상팔국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그 틈에 진한에 사로국이 신라의 전신으로서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런 과정 속에서 변한의 사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낙랑군이 축출된 4세기.. 2020. 12. 9.
신라 초기의 발전상 [삼국과 가야의 발전(4) - 신라] 신라는 동해안의 진한에서 나왔다고 했지요. 신라의 기원은 진한 소국 중 하나인 경주 지역의 사로국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박씨, 석씨, 김씨 3개 성씨가 돌아가면서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당시 사로국은 변한 지역에서 김해지역 구야국(금관가야)과 교류 및 경쟁을 하면서 성장하고 있었죠. 금관가야(구야국)은 일본과 교류했고, 평양 지역에서 한나라 군현으로서 처음 출범하여 이어져왔던 낙랑군과 무역을 하면서 먹고 살았죠. 한편 마한에서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은 그런 상황 속에서 구야국을 그리 앞서나가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극적인 전환점으로, 3세기 후반부터 시들시들해지던 이 한군현 낙랑군, 대방군이 마침내 4세기에 백제나 고구려의 압박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변.. 2020. 12. 6.
백제 초기의 발전상 [삼국과 가야의 발전(3) - 백제] 1. 기원전 18년 온조왕의 건국 : 앞서 고구려가 부여에서 나왔다고 했지요? 고구려에서 또 다시 주몽의 아들 온조가 이끄는 세력이 다시 한반도 중부로 내려옵니다. 바로 온조가 마한 지역에 내려가 나라를 건국하게 되는데, 그 때가 기원전 18년이었던 것이죠.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마한에는 목지국이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죠. 이 나라는 그에 비해 미약한 한강 유역(위례성)의 세력이었는데, 이 백제국이 점차 강성해져 마한을 통일해 나가게 되지요. 이 나라의 이름이 열 십자를 써서 '십제'였는데, 유민을 받아들이면서 백제가 되었다는 기록도 있고, '백제국'이 따로 있어서 그것이 큰 것이 백제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물론 이 영역은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의 협업으로 아직 논의.. 2020. 12. 3.
고구려 초기의 발전상 [삼국과 가야의 발전(2) - 고구려] 1. 1~2세기 제6대 태조왕 : 고구려의 시조는 기원전 37년~기원전 19년 사이에 재위했던 동명성왕, 즉 주몽입니다. 그런데 통상 태조라고 함은 왕조의 개창자를 의미하는데, 고구려 주몽은 동명성왕이고, 태조왕은 53~146년에 재위했다고 전해지는 다른 사람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한 것 같습니다. 애초에 동명성왕이 추대되었던 그 부족이 아닌 다른 부족이 새로 왕을 배출한 것이 태조왕인 것인지, 고주몽의 계루부라는 부족집단 고씨의 방계 집안에서 태조왕이 새로 왕위에 등극해서 그런 것인지, 여러 설이 있습니다. 어쨌건 태조왕은 전쟁도 하고 확장도 활발히 했던 것 같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옥저가 고구려에 많이 괴롭힘을 당했다고 했지요. .. 2020. 12. 1.
초기 삼국의 형성 과정과 왕권강화에 대하여 [삼국과 가야의 발전(1) - 왕권강화와 삼국의 형성 과정에 대하여] 1. 삼국의 성립 이전 시간까지만 해도 각 나라는 부족장들이 계속해서 왕을 쥐고 흔드는 장면들이 나왔습니다. 왕은 그저 외교나 전쟁을 할 때에 그 부족연맹을 대표하는 사람일 뿐이었지요. 그런 상태에서는 언제든지 부족이 떨어져나가거나,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인지, 점점 왕의 권한이 강해지게 됩니다. 왕권이 강해지면 부족들은 힘을 못 쓰게 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단 왕 아래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왕의 부하가 된 것은 아니죠. 나름대로 귀한 혈통으로서, 자기 동네에서는 나름 권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받는 '귀족'이 됩니다. 왕은 그 정도에서 만족할 리가 없습니다. 귀족이 국가를 운영.. 2020. 12. 1.
고구려의 제도와 풍습 [4. 고대국가의 형성 - '제도'에 대하여(5)] 4. 고구려 고구려는 사실 만주 북쪽에 부여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고구려의 시조는 동명성왕, 즉 주몽인데, 주몽이 부여에서 성장했다가 나중에 나와 고구려를 세웠다고 주몽신화에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렇게 부여에서 많은 사람들이 직접 내려왔는지는 알 수 없기도 하고, 고고학적으로 완벽히 증명이 되지는 않았다고 하네요. 다만, 주몽신화가 고구려에서 생산된 다양한 자료들에서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사람들에게 주몽신화는 꽤 당연한 것 같습니다. 다만, 고구려 사람들이 정신적으로는 확실히 부여를 계승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어떻게 나라를 운영해 나갔는지를 살펴보는 게 이번 시간의 핵심이겠죠. 고구려도 처음에는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2020. 11. 29.
삼한의 제도와 풍습 [4. 고대국가의 형성 - '제도'에 대하여(4)] 3. 삼한 좌측부터 마한-변한-진한, 즉 삼한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전형적인 모습으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세 개의 공동체들은 각각 여러 소국들이 모여 형성한 것들이고, 각각 오늘날 생각하는 국가의 모습이었는지는 명확히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추측되기를 청동기 문화를 향유하던 한반도 원주민에 더해, 북쪽에서 여러 난리들이 있을 때 마다 철기문화를 지닌 사람들이 한반도 중~남부의 삼한으로 내려온 것이죠. 이 삼한 내에도 읍락, 고을 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읍락, 고을 중에도 중심이 되는 세력이 있겠죠? 그리고 각 소국마다 중심 고을에 사는 우두머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우두머리의 이름은 '신지',.. 2020. 11. 28.
옥저, 동예의 상황과 풍습 [4. 고대국가의 형성 - '제도'에 대하여(3)] 2. 옥저와 동예 고조선이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의 침략을 받아서 망했다고 했죠? 고조선은 그렇게 기원전 2세기 말까지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창 고조선 사람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인 기원전 4세기에 예맥(濊貊)이라는 사람들이 압록강 중류에 살고 있었습니다. 압록강은 한반도 북서쪽에 있는 강이죠? 이 예맥이라는 이들이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인구 28만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중국에서 백만 대군이 어떻다 그러지만, 28만 명이라는 숫자도 많은 것이죠? 예맥 사람들은 압록강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많이들 이주했습니다. 예맥의 부족들 일부는 서쪽의 요동 지역에 편입이 되었고, 어떤 부족들은 한반도 동해안 지역으로 계속해서 이주했을 것입.. 2020. 11. 28.
부여의 생활 모습 한국사능력검정시험 / 고등학교 한국사 시험 대비 : '제도'에 대하여 24. 고대국가의 형성 - '제도'에 대하여(2) 이번 시간에는 고대국가의 성장 양상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사실 제도의 배경에 대해 이해를 시도해야 한다고 이전 시간에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고대사라는 것이 사료가 그렇게 막대하게 많은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고대사를 전공하시는 선생님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대부분의 사료들이 들어가 있는 상태입니다. 근현대사를 연구 하시는 선생님들은 아무리 많이 알아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을 겁니다. 고로 고대사는 외울 것이 교과서에서도 그리 많지는 않은 편입니다. 우리는 몇 가지 사실들을 중심으로 머릿속에 집어넣고, 당시 상황에 대해서 상상해보는 작업을 해보도록 합시다. 1. 부여 : 만주가.. 2020. 11. 27.
전근대 한국사, 야만적이라고? 4. 고대국가의 형성 - '제도'에 대하여(1) 이번 시간에는 '이해'와 '평가'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과거의 '제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함께 생각해봅니다. 위키 백과에 따르면, '이해'란 사건의 이유, 원인, 의미를 올바르게 알아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한편 '평가'는 어떤 대상의 가치를 규명하는 일이래요. 이 말은 즉 평가란 좋고 나쁨을 따지는 것, 도덕적인 판단을 수반하게 되는 것이죠. '제도'란 무엇일까요? 제도라는 말을 떠올리면 참 많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제도'를 단순히 정의하라면 학자들의 토론이 이어지겠죠. 결혼제도, 가족제도 같은 것들은 어디에나 있지만, 한국적인 결혼제도, 한국적인 가족제도 같은 범위에서는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있겠지요. 역사의 변화 속에서 어떻게 이렇게 특수한 .. 2020. 11. 26.
3. 고조선과 철기 유입 3. 고조선과 철기 유입 철기시대는 말 그대로 철이 등장한 시대입니다. 철이라는 것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아니고 어디선가 계속 사용되고 있었겠죠? 어떤 선생님은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이 등장했을 때, 비로소 청동기 시대의 고조선이 철기 시대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어디까지나 해석적인 차원에서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느냐의 문제이지,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대개 만주와 한반도의 철기 문화는 기원전 4~3세기 무렵에 중국 연나라에서 들어왔다고 하는데, 그 때 철을 다루는 기술자들이 들어온 것이겠죠. 철 기술자가 생기니, 날쌔고 강한 강철검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죠. 드라마 주몽의 모팔모가 생각나는 순간입니다. "강철검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철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은 세형 동검입니다. 아.. 2020. 11. 26.
2.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는 말 그대로 청동으로 된 물품을 만들어 사용하던 시기입니다. 청동기 시대라고 해서 석기를 내다 버린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석기들은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었죠. 다만 앞서 말한 석기시대들보다 더욱 더 많은 곡식을 수확할 수 있게 되었고, 곡식을 쌓아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말은 즉, '어떻게 많이 생산할 수 있을까?' 뿐만 아니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라는 고민이 더욱 구체적으로 떠오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누가 분배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될 것입니다. '정치 권력'이라는 것이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여러분들은 생산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요, 분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요? 물론 이 문제의 답은 아직까지 내려지지 못했고, '둘 다 중요하다'고 결론 지을.. 2020.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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