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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 고대사

백제 초기의 발전상

by 취미와 문화 2020.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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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과 가야의 발전(3) - 백제]

1. 기원전 18년 온조왕의 건국 :

  앞서 고구려가 부여에서 나왔다고 했지요? 고구려에서 또 다시 주몽의 아들 온조가 이끄는 세력이 다시 한반도 중부로 내려옵니다. 바로 온조가 마한 지역에 내려가 나라를 건국하게 되는데, 그 때가 기원전 18년이었던 것이죠.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마한에는 목지국이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죠. 이 나라는 그에 비해 미약한 한강 유역(위례성)의 세력이었는데, 이 백제국이 점차 강성해져 마한을 통일해 나가게 되지요. 이 나라의 이름이 열 십자를 써서 '십제'였는데, 유민을 받아들이면서 백제가 되었다는 기록도 있고, '백제국'이 따로 있어서 그것이 큰 것이 백제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물론 이 영역은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의 협업으로 아직 논의중에 있습니다. 

  어쨌건 백제는 그렇게 따지고 보면 부여에서 나온 족속들인 것이죠. 훗날 6세기에 백제 성왕 시기에 백제는 남부여 국호를 사용하게 되는데, 그것이 어쩌면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뿌리를 부여에 두고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와 부여의 왕실은 자기 스스로 하늘의 아들임을 자처했는데, 주몽이 하늘의 신의 혈통으로서 부여에서 태어났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지요. 고구려나 백제가 부여를 계승한다는 것은 곧 자신들도 하늘의 자손임을 자처한 것과 다름 없습니다. 

  백제의 시작점으로 지적되기도 하는 한강 유역을 발굴해보니, 3세기 중반까지는 토광목관묘가 나타나는데, 3세기 중반부터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기단식 적석묘(계단모양 돌무지 무덤)로 바뀌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전성기가 끝난 백제가 위기를 맞아 천도한 공주에 만들어진 무령왕릉에서 볼 수 있듯, 이때부터는 돌방무덤이 만들어지게 되지요. 무덤 양식의 변화에 대해서는 이후에 다시 한 번 정리하도록 하고요. 이렇게 묘제가 바뀐다는 것은 지배 세력의 교체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전근대를 무시한다고 해도, 전근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배산임수의 매장 풍습, 동그란 무덤모양을 쉽게 버리지는 못합니다. 굳이 그럴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조상님들을 굳이 다른 나라의 풍습에 따라 피라미드를 만들 수도 없고, 유목민족들의 전통처럼 까마귀에게 시신을 주는 식의 장례로 보내드리기는 매우 꺼려집니다. 그런 점에서 무덤 양식의 변화는 가치관, 나아가서는 지배층의 정신세계 전반이 바뀌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3세기(234~286 재위) 고이왕

  고이왕은 한강유역을 장악하고, 관등제를 정비했다고 알려져 있죠. 관등제를 정비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앞서 각국의 제도와 풍습들을 살펴보면서, 관등제를 정비했다는 것은 왕 아래 연맹체의 사람들을 놓고, 귀족제를 형성하는 과정 중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고 했지요? 그리고 백제 특유의 수상 격의 직책인 좌평을 6명 두었다는 6좌평제도까지 성립되었다고 삼국사기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물론 관등제와 6좌평제가 실제로 고이왕 당시에 정비했다고 하는 것은 학계에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조심스러워 하는데, 일단 고이왕 때가 그런 정도의 백제 세력의 전환기였던 것만은 맞는 것 같다고 판단됩니다. 어쨌건 고이왕 때에 '관등제의 정비'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일단 시험의 정답으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백제의 전성기는 4세기에 도래하는데, 3세기 말까지 이끈 고이왕의 업적은 백제 전성기의 기반을 닦아놓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고이왕 때에 한강 유역까지 백제국이 완전히 확장한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백제국이 확장했다는 것은 고이왕 단계에서는 일단 마한 소국 중 하나인 백제국이 다른 마한 소국들의 맹주로 떠오르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마한의 목지국은 점점 허약해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런 과정을 거쳐 백제국은 마한의 맹주를 넘어, 마한 지역을 백제의 땅으로 만들었고, 마한 소국들의 왕이 아닌 백제 왕으로서 그 지역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제솔회의'라는 것이 형성됩니다. '제'는 여러 제 글자를 쓸 것이고, '솔'이란 '솔'자로 끝나는 관등 이름을 말합니다. 백제에 '솔'로 끝나는 관등이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솔'이라는 이들은 곧 다른 세력을 백제국 아래에 두면서, 다른 소국의 수장들을 귀족으로 들이는 과정에서 수여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제솔회의는 전국 대표자 회의 격으로 매우 규모가 큰 회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 '정사암회의'라는 것이 보통 교과서에서 소개가 되지요. 이것은 방금 언급한 백제의 수상 격인 '좌평'들이 주도하는 회의입니다. 정사암회의는 남녘 남, 집 당 자를 쓰는 '남당'이라는 기관에서 담당했는데, 이 남당에서 국가의 재상을 선출할 때에 바위 위에 3~4명의 이름을 적어 입후보하였다고 하였다고 하죠.

  제솔회의는 각 소국들의 유력자들을 백제국에 점점 흡수하는 과정에서 등장했으니, 고이왕 때 등장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정사암회의가 좌평들이 주도하는 회의라고 했는데, 과연 고이왕때 관등과 좌평들이 나왔겠느냐 했지요? 사실 훗날 5세기에야 정사암회의라는 게 등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 제솔회의라는 것을 소집한다면 전국의 대표자가 소집될 것이므로 비교적 많은 시간과 수고가 들겠지만, 정사암회의는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일처리가 가능하겠지요. 

 

 

참고자료

(신)뿌리깊은 한국사 1권

2015 수능특강 한국사

송호정 외, <<한국고대사 1 - 고대 국가의 성립과 전개>>

백제가 건국되고 온조왕이 즉위하다, <<삼국사기>> db.history.go.kr/id/sg_023r_0020_0010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백제가 건국되고 온조왕이 즉위하다 ( 기원전 18년 )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였다.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

db.history.go.kr

백제 건국, contents.history.go.kr/front/kc/main.do?levelId=kc_i101001&whereStr=%40where+%7B+IDX_TITLE%28HASALL%7C%27%EB%B0%B1%EC%A0%9C+%EA%B1%B4%EA%B5%AD%27%7C100000%7C0%29+or+IDX_CONTENT%28HASALL%7C%27%EB%B0%B1%EC%A0%9C+%EA%B1%B4%EA%B5%AD%27%7C100%7C0%29+or+IDX_ALL%28HASALL%7C%27%EB%B0%B1%EC%A0%9C+%EA%B1%B4%EA%B5%AD%27%7C1%7C0%29+%7D 

 

우리역사넷 > 한국사연대기

 

contents.history.go.kr

 

제솔회의와 정사암회의, 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06_0050_0010_0040&whereStr=%40where+%7B+IDX_TITLE%28HASALL%7C%27%EC%A0%95%EC%82%AC%EC%95%94+%EC%86%94%27%7C100000%7C0%29+or+IDX_CONTENT%28HASALL%7C%27%EC%A0%95%EC%82%AC%EC%95%94+%EC%86%94%27%7C100%7C0%29+or+IDX_ALL%28HASALL%7C%27%EC%A0%95%EC%82%AC%EC%95%94+%EC%86%94%27%7C1%7C0%29+%7D

 

우리역사넷

4) 귀족회의체  백제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정치운영에 있어서는 귀족들의 회의체에 의한 합좌제적 성격은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백제의 귀족회의체는 佐平會議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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