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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 고대사

고구려 초기의 발전상

by 취미와 문화 2020.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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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과 가야의 발전(2) - 고구려]

 

1. 1~2세기 제6대 태조왕 : 고구려의 시조는 기원전 37년~기원전 19년 사이에 재위했던 동명성왕, 즉 주몽입니다. 그런데 통상 태조라고 함은 왕조의 개창자를 의미하는데, 고구려 주몽은 동명성왕이고, 태조왕은 53~146년에 재위했다고 전해지는 다른 사람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한 것 같습니다. 애초에 동명성왕이 추대되었던 그 부족이 아닌 다른 부족이 새로 왕을 배출한 것이 태조왕인 것인지, 고주몽의 계루부라는 부족집단 고씨의 방계 집안에서 태조왕이 새로 왕위에 등극해서 그런 것인지, 여러 설이 있습니다.

  어쨌건 태조왕은 전쟁도 하고 확장도 활발히 했던 것 같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옥저가 고구려에 많이 괴롭힘을 당했다고 했지요. 결국 태조왕에 의해 옥저가 정복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한편 태조왕은 요동 지역으로 진출을 꾀했습니다. 그렇게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부족들이 고구려라는 정체성 아래 모여있어야 하는데, 태조왕이 그 5부족을 고구려 안에 묶은 '5부제'를 확립했다더라.

  태조왕이 정말 거의 120살을 살았다는데, 거의 100년 가까운 시간을 재위했다고 전해지지요. 실제로인지는 모르겠으나, 태조왕이 말년에 늙어서 지쳤는지 야심있는 친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동생이라 해 봤자 이미 노인이었겠지요. 태조왕은 결국 쓸쓸한 말년을 맞았습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고구려의 부족장들이 왕을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계루부 고씨인 태조왕이 같은 성씨인 친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태조왕은 5부제를 확립하여 옥저도 정복하고, 요동지역으로 정복도 꾀하며 잘 나가다가, 말년에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더라. 그런데 그게 또 계루부 고씨 내에 왕위세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더라 이거죠.

 

2. 2세기 후반 고국천왕 : 훗날 고국천왕이 등장합니다. 고구려는 태조왕 때에 5개 부족 집단이 연합한 상태로서, 여기저기 정복활동을 진행하고 있었죠. 하지만 국가 내부적으로는 각 부족들은 왕에게 완전히 복종한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여전히 부족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어서, 사사건건 왕에게 간섭을 한 것이지요. 이제 한 걸음 더 중앙집권적인 고구려를 꾸려나간 이가 바로 고국천왕입니다. 보통 고국천왕은 5부를 행정적인 성격으로 개편했다고 소개가 되는데, 기존의 계루부, 소노부, 연노부 같은 독자적인 부족단위를 동부, 서부, 남부, 내부 등 방위명으로 바꾼 것입니다. 결국 그 중심지가 존재하게 되고, 나머지는 그 동쪽, 서쪽, 남쪽 이런 식으로 지방 행정구역으로 인식이 된 것입니다. 물론 행정 개혁이라는 것이 고국천왕 때 단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닐지라도, 고국천왕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기존의 부족중심의 5부체제가 무너지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이런 개혁에는 부족장으로서 존재했던 각 '가'들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어찌 그것을 왕의 군대로 수습을 하긴 했으나, 새로운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그럴 때 등장한 유명한 재상으로 '을파소'라는 인물이 있지요. 을파소는 진대법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는데, 이 진대법은 '구휼'제도입니다. 어떤 특강에서 원로 사학자께서 말씀하시길, 진휼과 구휼은 엄연히 다르다고 하시던 게 기억이 납니다. 진휼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어떤 사정으로 백성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나 왕이 은덕을 베풀기 위해서 청고를 풀어 백성들에게 그것을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진대법 같은 구휼은 지원은 하나 훗날 갚아야 하는 제도를 일컫습니다. 구휼제도인 진대법은 춘대추납, 그러니까 곡식이 없는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수확을 하는 가을에 갚는 형식입니다.

   물론 진휼제도나 진대법 같은 구휼제도나 사실 왕이 주도하는 복지정책입니다. 만약에 우리 입장에서도 어려운 집에 어떤 재단이 장학금을 지원한다고 하면, 그 재단의 이름을 잘 잊어버리지 않게 되지요. 사실 어떤 부족이나 귀족 휘하에 속해있던 이들로서는 왕보다는 부족장인 '가'들이 더욱 익숙할테지만, 이렇게 진대법을 시행함으로써 왕실이라는 복지재단을 알 수 있게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실질적 권력자는 왕이라고 인식을 할 수도 있겠지요.

  글쎄요, 이 전반적인 변화는 전반적으로 유교적인 영향인 것인지, 농경문화가 점차 강해지고 있었던 것인지 모르지만, 기존에 부족적 5부의 성격이 무너지자 점차 부족이나 친인척 간에 유대가 소홀해져갔고, 점차 고구려 특유의 형사취수제도 사라져가고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자결을 하는 문화가 조성이 되고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각 가정들은 큰 범위의 친인척보다는 한 집안에 아버지가 중심으로 서는 가족 형태가 점점 일반화되어가고 있었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충성은 곧, 크게 보아 나라의 아버지인 군주에 대한 충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곧 유교적 통치이념의 핵심이지요. 한편 정복전쟁을 하면서 부를 축적하게 되니, 부족 공동체 질서보다는 빈부와 삶의 방식의 차이로 인해 계층분화가 일어났다고도 합니다. 그런 사회적 맥락에서인지, 고국천왕이 태자로서 왕위에 올랐으니 부자상속제가 고국천왕 때에 확립이 되었다고 표현이 되지요. 다만 근래에는 역사학자들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이 때 무조건 이행해갔다고 못박아놓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저도 조금 더 공부가 필요하겠습니다. 어쨌건 시험에는 여전히 부자상속제 확립의 기준은 고국천왕입니다.

  정리하자면, 부자상속제로 왕위에 오른 고국천왕은 부자상속제를 확립했다고 평가되며, 그는 5부를 행정적 성격으로 개편했고, 그 반발을 대비하여 을파소를 등용하여 진대법으로 민심을 잡았다. 그렇게 정리 할 수 있지요.

 

* 참고자료

2015 수능특강 한국사

송호정 외, <<한국고대사 1>> pp.59~60.

여호규, <고구려 초기의 왕위계승원리와 고추가>, <<동방학지>> 제150호,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0.

태조왕, contents.history.go.kr/front/kc/main.do?levelId=kc_n101800&whereStr=%40where+%7B+IDX_TITLE%28HASALL%7C%27%EA%B3%A0%EA%B5%AC%EB%A0%A4+%ED%83%9C%EC%A1%B0%EC%99%95+%EA%B3%84%EB%A3%A8%EB%B6%80+%EA%B3%A0%EC%94%A8%27%7C100000%7C0%29+or+IDX_CONTENT%28HASALL%7C%27%EA%B3%A0%EA%B5%AC%EB%A0%A4+%ED%83%9C%EC%A1%B0%EC%99%95+%EA%B3%84%EB%A3%A8%EB%B6%80+%EA%B3%A0%EC%94%A8%27%7C100%7C0%29+or+IDX_ALL%28HASALL%7C%27%EA%B3%A0%EA%B5%AC%EB%A0%A4+%ED%83%9C%EC%A1%B0%EC%99%95+%EA%B3%84%EB%A3%A8%EB%B6%80+%EA%B3%A0%EC%94%A8%27%7C1%7C0%29+%7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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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천왕, contents.history.go.kr/front/kc/main.do?levelId=kc_n100302&whereStr=%40where+%7B+IDX_TITLE%28HASALL%7C%27%EA%B3%A0%EA%B5%AD%EC%B2%9C%EC%99%95%27%7C100000%7C0%29+or+IDX_CONTENT%28HASALL%7C%27%EA%B3%A0%EA%B5%AD%EC%B2%9C%EC%99%95%27%7C100%7C0%29+or+IDX_ALL%28HASALL%7C%27%EA%B3%A0%EA%B5%AD%EC%B2%9C%EC%99%95%27%7C1%7C0%29+%7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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