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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 고대사

초기 삼국의 형성 과정과 왕권강화에 대하여

by 취미와 문화 2020.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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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과 가야의 발전(1)  - 왕권강화와 삼국의 형성 과정에 대하여]

1. 삼국의 성립

  이전 시간까지만 해도 각 나라는 부족장들이 계속해서 왕을 쥐고 흔드는 장면들이 나왔습니다. 왕은 그저 외교나 전쟁을 할 때에 그 부족연맹을 대표하는 사람일 뿐이었지요. 그런 상태에서는 언제든지 부족이 떨어져나가거나,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인지, 점점 왕의 권한이 강해지게 됩니다. 왕권이 강해지면 부족들은 힘을 못 쓰게 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단 왕 아래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왕의 부하가 된 것은 아니죠. 나름대로 귀한 혈통으로서, 자기 동네에서는 나름 권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받는 '귀족'이 됩니다. 왕은 그 정도에서 만족할 리가 없습니다. 귀족이 국가를 운영하는 데에 협조를 해서 도움을 주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오늘날 국가에 귀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마이너스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어떤 능력이 있어서 권력을 잡은 것도 아니고, 어떤 카리스마가 있어서 권력을 잡은 게 아니라, 단지 혈통 때문이라면 참으로 불합리해보입니다.

  국가 운영에서 효율성을 추구한다면, 귀족이라는 존재들은 참으로 걸리적거리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왕은 자신의 말을 잘 듣는 별도의 신하들이면서, 왕이 가진 것들을 함부로 탐낼 생각을 못하는 '관료'들을 선발합니다. 오늘날에 가장 가까운 개념은 행정부가 있다는 것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대통령이 물론 왕은 아니지만, 행정부는 법령과 대통령령에 따라 맨 아래 동사무소 단위까지 최대한 규격에 맞추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추구합니다. 행정부에 있는 사람들은 입법부인 국회와는 달리, 어떻게 국가를 운영해야 옳은가?에 대해서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 없습니다. 행정 관료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권력을 이행하는 데에 궁극적으로 임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다양한 나라들이 어떻게 고구려-백제-신라라는 3국으로 뭉칠 수 있게 한, 왕권강화의 원동력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왕권 강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이고, 어떤 특정한 이유 때문에 왕권강화가 되었다라고 말하기는 물론 어렵습니다. 다만 역사학자들이 율령 반포, 불교의 수용, 활발한 정복 활동, 중앙관제 정비 및 관복제정 등이 그 요인으로서 합리적으로 지적할만하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1) 율령 반포 및 중앙관제 정비 : 먼저 왕 아래 신하들이 일사분란하게 왕의 명령을 따를 수 있는 체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바로 율령이라고 합니다. 율령에서 율은 형법을 말합니다. 형법은 잘못을 하면 벌을 주는 규칙이죠? 잘못을 했을 때 벌을 준다는 것은 '어떤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한편 율령에서 령은 행정법에 해당합니다. 곧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는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행정문서는 어떤 양식을 맞추어야 한다는 식이죠. 오늘날 학생들의 경우에는 반-번호-이름을 시험지에 써야한다는 식입니다.

  음, 그렇다면 당시의 율령은 어떤 조항이 들어있길래 그렇게 설명하느냐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사실 기록상 언제 '율령이 반포되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만, 그 명확한 내용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늘날의 법전처럼, 고구려-백제-신라 등에서 만든 법전이 남아있을 수는 없지요. 다만 역사학자들이 역사 자료들 속에서 언제 누가 무엇을 하고, 어떤 기관이 세워졌고, 무엇을 처벌하였는지 살펴보면서 잘 정리를 해 둔 것이죠. 

   통상 왕의 하수인인 '관료'는 원칙적으로는 왕을 견제하는 부족장 혹은 귀족들과 대립하는 존재들입니다. 관료들은 왕의 명령을 철저히 이행하는 자들이고, 부족장이나 귀족들은 왕의 권력을 견제하는 이들이니까요. 만약 중앙관료제도를 정비한다는 것은 그 정도로 왕의 권한이 강해졌다는 것이거나, 왕권 강화를 꾀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한편, 부족적 전통이나 귀족의 권력이 이전에 비해 약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신분으로서 골품제와 관료제로서 관등제가 서로 섞여있는 것이 신라 제도입니다. 비진골인 6두품 '아찬' 관등 바로 위는, 진골부터 수여 가능한 5두품 '대아찬'입니다. 그러나 진골이 아닌 사람은 진골을 위한 관등을 가질 수 없으므로, '6두품'이 출세에 한계를 갖는다는 것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진골이라는 이들이 왕의 자리를 끊임없이 넘보면서 견제를 들어오고, 왕은 막상 왕위를 노릴 수 없는 비 진골계층인 6두품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신라 사회에서 6두품은 사실 아무리 노력해도 왕이 될 수 없거든요.

  관복을 제정하는 행위 조치도 왕권강화와 관련됩니다. 신라 골품제와 두품제의 예로 설명을 해본다면, 법흥왕은 두품과 골품을 고려하여 계층에 따라 관복을 정해주었습니다. 관복은 각 층마다 색깔이 달랐는데, 이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만약 우리 학교에서 성적 순에 따라 옷 색깔을 달리한다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어쩌면 처음에는 그렇게 옷 색깔을 바꾸는 게 인권모독이라고 엄청난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낮은 성적 전용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동네에서 웬만하면 교복을 입고 다니지 않겠죠. 그런데 그 제도가 관습처럼 사람들에게 익숙해지고 받아들여진 후에는, 오히려 비판은 누그러지고 어느 새 자기들끼리 경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2) 불교 수용 : 불교는 어떤 것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끊어내려는 종교로 알고 있습니다. 일단 이 세상의 본질이 무엇인가, 이 질문 자체를 부정하는 종교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무소유가 어떻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아주 옛날에는 무위자연을 꿈꾸는 도교와 불교가 혼동되었을 정도였지요. 이 점에서 기독교 같은 유일신교가 하나님을 세계의 본질을 만든 사람으로 지적하는 것과는 정 반대의 방향에 서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불교는 일단 윤회를 믿는다고 합니다. 이전의 삶에 잘 살면 좋게 태어나고, 나쁘게 살면 나쁘게 태어난다는 것이죠. 그래서 왕은 옛날에 이미 왕이 될 만한 전생을 살았고, 천한 사람들은 전생을 천하게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천한 사람들도 현세에 귀하게 살면 다음 생에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윤회의 시스템일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 불교에서 잘 사는 삶이 왕으로서 권력을 누리는 삶일까요? 정말 왕실에서 '내가 곧 부처이니라'라고 주장하는 것이 정말 순수한 불교에서 먹히는 이야기일까요? 불교가 왜 속세의 결정판인 왕의 권력을 강화시켜주는 수단이 될까요?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제가 지식이 짧기에 여러가지의 설이 어떤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저는 고등학교 사회 시간에 가장 중요한 인물로 다루는 막스 베버의 이야기를 조금 빌려, 제 나름의 생각을 이야기해보죠. 누구든지 최고 권력에 도달하려면 그 사람에게 특유의 '카리스마'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신라의 진흥왕의 손자인 진평왕이 왕즉불 사상을 확립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진평왕은 자신을 석가모니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렀고, 왕비의 이름을 석가모니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마야부인이라고 불렀지요. 진평왕의 아우도 그렇고, 진평왕의 딸인 선덕여왕의 이름인 덕만 역시 불경에 나오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불교 왕실이 만들어진 것이죠. 과연 다음 생에 이렇게 착실하게 불교를 따르는 왕실이 천민으로 떨어질까요? 그리고 과연 먹고살기 힘든 천민들은 왕실보다 부처님처럼 살 수 있을까요? 결국 왕실은 스스로, 우리는 '종교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백성들은 그렇다면 왕실이나 귀족들의 '종교적인 능력'을 어째서 기꺼이 인정하게 될까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 중 하나로 지적할 만한 것은, 우리의 민간신앙의 존재 같습니다. 만약 아들이 장가를 가게 빈다고 할 때에, 물이라도 하나 떠다가 놓고 빌지요. 어디까지나 신비로운 힘을 보태줄 수 있는 부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텐데, 더 화려하고 더 큰 절에서 소원을 빈다면 더더욱 좋지 않을까요? 그리고 불교에서는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보살님도 계시잖아요? 왕실이나 귀족은 백성들에게 신앙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불교가 들어올 당시에는 조금 더 민간신앙의 영향이 현재보다는 더더욱 강력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어쨌건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이렇게 각국에 퍼지는 과정에서, 각 나라 사정에 맞게 개량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국 북부 불교, 남부불교, 한국불교, 일본불교 모두 그 모습이 다르지요. 

  3) 활발한 정복활동 : 일단 정복활동은 피 정복민의 착취를 전제합니다. 이익이 없다면 정복을 할 이유가 없죠. 물론 그 정복의 동기라고 한다면,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런 것도 있겠고, 부를 축적하고 싶은 마음은 있겠지만, 어쨌건 성공만 한다면 그 공동체의 사정이 더 나아질 겁니다. 정복은 단지 상대 진영을 부수고 못 쓰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지역의 사람들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죠. 노예를 얻든, 속민을 얻든 간에 승전국은 그 전리품을 나누면서 끈끈한 우애를 다질 수 있겠죠.

   물론 정복민에 대해서 어떻게 다루었는가, 그리고 정복민들이 명확히 '우리는 어느 나라 사람이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아직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단지 삼국시대 당시 지방 사람들이 어떤 구조의 촌락을 형성하고 있었는지 어렴풋하게 밖에 알 수 없는 실정이지요. 자료가 부족하니 말입니다. 

  어쨌건 백제의 근초고왕,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 같은 사람들이 정복활동을 했다는 것을 영토로 표시해놓는 데에 집착을 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당시 국경이라는 개념이 정말 실존했을까 라는 문제도 있습니다. 사실 그 영토 경계는 학자들이 사료들을 바탕으로 추정하여 임시로 그어놓은 선입니다. 그 선이 너무 좁다고 식민사관에 빠져있다고 비판할 이유도 없습니다. 일단 어디까지 정복을 했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도 미지수이니 말이죠. 어쨌건 정복전쟁을 했다는 사실을 통해, 왕은 뛰어난 업적을 쌓은 것이 되고, 국가적 차원에서는 다른 세력을 착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왕권 강화를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반대로 계속 다른 나라에 당하는 나라 입장에서는 왕권이 강하긴 어렵겠죠.

 

 

초기국가의 정복전쟁, 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04_0020_0030_0010&whereStr=%40where+%7B+IDX_TITLE%28HASALL%7C%27%EC%A0%95%EB%B3%B5+%ED%99%9C%EB%8F%99%27%7C100000%7C0%29+or+IDX_CONTENT%28HASALL%7C%27%EC%A0%95%EB%B3%B5+%ED%99%9C%EB%8F%99%27%7C100%7C0%29+or+IDX_ALL%28HASALL%7C%27%EC%A0%95%EB%B3%B5+%ED%99%9C%EB%8F%99%27%7C1%7C0%29+%7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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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정복 전쟁을 합리화하고 고대 국가 체제를 뒷받침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불교에서는 법의 보편성이 강조되는데 그 법의 이념은 바로 왕의 법, 왕권과 직결된다. 이것은 법의 보편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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