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고대국가의 형성 - '제도'에 대하여(4)]
3. 삼한
좌측부터 마한-변한-진한, 즉 삼한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전형적인 모습으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세 개의 공동체들은 각각 여러 소국들이 모여 형성한 것들이고, 각각 오늘날 생각하는 국가의 모습이었는지는 명확히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추측되기를 청동기 문화를 향유하던 한반도 원주민에 더해, 북쪽에서 여러 난리들이 있을 때 마다 철기문화를 지닌 사람들이 한반도 중~남부의 삼한으로 내려온 것이죠.
이 삼한 내에도 읍락, 고을 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읍락, 고을 중에도 중심이 되는 세력이 있겠죠? 그리고 각 소국마다 중심 고을에 사는 우두머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우두머리의 이름은 '신지', '읍차' 등으로 불렸습니다. 세력이 큰 소국의 우두머리는 보통 '신지'라고 불렸고, 힘이 약한 소국의 우두머리는 '읍차'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읍락들을 대표하여 국읍의 우두머리가 여러 면에서 이들을 대표했겠지만, 특히 다른 소국과 외교를 할 때에 '신지', '읍차'가 나섰던 것입니다. 서로 교역을 하거나 전쟁을 할 때에, 이 '신지', '읍차'가 대표자로서 교섭을 하거나 전쟁을 지휘한 것이죠.
각 삼한 소국들 내의 중심지인 국읍을 살펴보면, 제사를 지내는 곳이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천군'이라고 하는 제사장, 제사를 주도하는 사람이 있었고, '소도'라고 하는 신성한 지역이 따로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 고조선의 사례를 생각해본다면, 단군왕검은 정치도 하고 제사도 하지 않았나요? 이에 비해 삼한은 정치랑 제사랑 조금 분리가 된 모습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정치를 하는 데에, 종교 없이도 정치를 할 수 있는 영역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굳이 하늘께 묻고 따지지 않아도, 정치 지도자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는 부분이 생겼다는 것이죠.
삼한의 풍습을 보자면 5월제와 10월제가 있는데, 역시 농삿일에 맞추어 수확을 기원하거나 수확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제사를 지낸 것 같습니다. 특히 남쪽 지방에서 벼농사가 발달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이 남부지역에는 여전히 벼농사를 많이 짓고 있지요. 삼한 지역에 사는 농민들 사이에 특히 '두레'를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두레는 현대 농촌에까지 남아있는 풍속이었습니다. 물론 21세기에 두레가 운영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농삿일은 각 집집마다 짓겠지만, 특히 수확철에 모두 각 집집마다의 수확하는 데에 참 속도도 안 나고, 능률도 안 오릅니다. 그래서 마을 단위로 농사짓는 사람들이 모여서 한 집씩 빠른 속도로 수확을 해결해나가는 공동체가 바로 '두레'입니다.
마한-진한-변한 중에 마한이 가장 먼저 강력해졌고, 마한에 목지국이라는 소국의 지배자가 사실상 삼한 전체를 주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강력한 마한은 삼국시대에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았던 백제의 전신이 됩니다. 한편 그 동쪽에 변한 지역에서는 철 생산이 점차 활발해졌고, 평양 지역의 낙랑과 현재 일본인 왜에게 철제품을 수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변한 지역에 가야가 들어선 뒤에도, 가야는 여전히 철 제품이 활발하게 생산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동쪽에 경상도~강원도 남부 지역을 끼고 있던 진한은 신라로 성장해 나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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