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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 고대사

옥저, 동예의 상황과 풍습

by 취미와 문화 2020.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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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대국가의 형성 - '제도'에 대하여(3)]

 

2. 옥저와 동예

  고조선이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의 침략을 받아서 망했다고 했죠? 고조선은 그렇게 기원전 2세기 말까지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창 고조선 사람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인 기원전 4세기에 예맥(濊貊)이라는 사람들이 압록강 중류에 살고 있었습니다. 압록강은 한반도 북서쪽에 있는 강이죠? 이 예맥이라는 이들이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인구 28만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중국에서 백만 대군이 어떻다 그러지만, 28만 명이라는 숫자도 많은 것이죠? 

  예맥 사람들은 압록강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많이들 이주했습니다. 예맥의 부족들 일부는 서쪽의 요동 지역에 편입이 되었고, 어떤 부족들은 한반도 동해안 지역으로 계속해서 이주했을 것입니다. 

 1) 옥저 : '옥저'라는 세력은 함경도 함흥 일대와 그 주변에 분포를 했습니다. 이 함흥 지역은 나중에 국경에서 자주 언급이 되니까, 눈에 익혀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옥저 남부에는 5000호가 살았다고 하는데, 다른 소국들이 2000~3000호 였던 것에 비한다면, 꽤 큰 공동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 옥저 사람들이 고조선과 고구려 같은 초강대국들에게 계속해서 괴롭힘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다른 나라들의 간섭이나 지배를 받는 와중에, 함부로 왕을 세울 수도 없었고, 그렇게 발전하기에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읍군', '삼로' 같은 고을의 우두머리나 연장자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옥저 전체의 정치 사안을 다루었을 거라 추정됩니다.

  나중에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평양 인근에 낙랑군이라는 군현을 설치했을 때, 옥저는 오히려 고조선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겠죠. 하지만 고구려가 점점 강성해지는 바람에 기원후 50년 전후로는 고구려에 실질적으로 속하게 됩니다. 결국 고구려에서 옥저에 몇몇 관등을 내리고 신하로 만들어, 계속해서 물고기, 소금 같은 바닷가에서 나는 것들을 바치게 했습니다. 그리고 옥저의 미인들이 있으면 고구려에서 시집을 들게 했다고 하네요. 결국 이렇게 저렇게 두드려 맞기만 하다가, 왕을 제대로 세우지도 못하고 슬프게 사라진 것 같습니다.

  옥저 사람들의 풍습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민며느리제'가 있었습니다. 민며느리제는 "여자가 열 살에 결혼상대를 정하고, 남자 집에 들어갔다가, 성인이 되면 며느리가 친가로 돌아가는데, 남편 집에서 지참금을 주어야 다시 며느리가 돌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글이나 말로만 보면, 당시 여성 인권이 아주 돈과 바꿔질 만큼 낮구나 싶기도 합니다만, 우리에게는 더욱 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가족이라는 단위에서 보면, 며느리 쪽 집안에서 미쳤다고 애지중지 키운 딸을 그냥 넘겨버리는 걸까요? 아니면 그냥 열 살 까지 최대한 대충 키웠던 걸까? 당시로서는 대충 키우고 말고가 없이 일단 먹여 살리는 것도 버거운 시대였으리라 생각됩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가족 한 명 한 명의 노동력이 필요한 상황인데, 이제 막 밭일에 투입할 수 있는 딸이 하나 생겼는데 남의 집에 보낸다고 하네요. 지참금은 10살에서 성인이 될때까지 노동력을 가져간 대가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해석도 가능하죠. 남자의 집 쪽에서 이 어린 아이를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준 대가로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죠. 어쨌건 당시 노동력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통상적인 해석인 것 같습니다. 

2) 동예 : 동예 역시 정치적 상황은 옥저와 거의 같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단 위치 면에서 옥저 남쪽에 위치해있음을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요. 동예 역시 마찬가지로 예맥 세력으로서 고구려의 간섭을 받다가 비실비실 바닷가에서 나는 것들을 바치다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다만 동예의 특산품으로는 단궁과 과하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단궁은 말 그대로 짧은 궁을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 과하마는 과일 나무 아래를 지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말입니다. 지금에야 제주도를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말이 엄청나게 큽니다. 옛날에는 여기저기에서 작은 품종의 말이 사용되어왔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몽골의 말 역시, 말 등에 타면 발바닥이 땅에 닿을랑 말랑 했다고 전해집니다. 동예 역시도 그런 모양새가 아니었을까요? 이런 과하마가 중국까지 동예의 특산품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과하마를 타는 사람이나, 과하마가 끄는 마차가 있었던 것이겠죠? 

  동예의 풍습으로는 책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부족의 영역을 침범하면 노비, 소, 말 등으로 배상을 해 주는 것이죠. 이 풍습을 보면 '아, 각자 영역을 인정해주는구나' 정도로 보고 넘어갈 수 있지요. 하지만 지금 현대의 우리를 생각했을 때, 과연 다른 동네를 간다고 그게 죄 지은 것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동네든지, 옆 동네든지 전부 같은 국가 권력에 소속되어 있으니 그렇습니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 없고, 각 동네마다 짱을 선출해놓는다면, 실질적으로는 다른 권력체입니다. 책화라는 풍습이 있다는 것은 동예가 아직 각 부족마다 연맹을 하여 하나의 왕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예에는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무천' 행사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에는 이걸 외우려고 [동예의 무천과 책화 = 동무! 책 가져가시라우!]라고 외웠던 기억이 나네요. 앞 글자 따서 외우는 게 그리 좋은 현상은 아닙니다만, 어쨌건 음력 10월에 행사를 지낸다는 것은 대강 겨울이 오기 전해 한해 농사를 총 결산하는 의미도 있겠지요. 오늘날에 추석이 음력 8월 15일이니 말이죠. 아, 그리고 당시 10월에 무천이 어쩌고, 12월 부여의 영고가 어쩌고 하는 것은 중국의 은나라 달력을 기준으로 합니다. 하지만 시험에서 굳이 양력 몇월 며칠인지 계산할 필요는 없겠죠? 

 

* 참고자료

송호정 외, <<한국고대사 1 - 고대 국가의 성립과 전개>>

2015 수능특강 한국사

은나라 달력 기준 행사, 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10101&tabId=03&levelId=hm_003_0010&whereStr=%40where+%7B+IDX_TITLE%28HASALL%7C%27%EB%8B%AC%EB%A0%A5%27%7C100000%7C0%29+or+IDX_CONTENT%28HASALL%7C%27%EB%8B%AC%EB%A0%A5%27%7C100%7C0%29+or+IDX_ALL%28HASALL%7C%27%EB%8B%AC%EB%A0%A5%27%7C1%7C0%29+%7D  

 

우리역사넷

以殷正月祭天, ……(中略)……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中略)…… 於是時斷刑獄, 解囚徒.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contents.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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