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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 고대사

부여의 생활 모습

by 취미와 문화 2020.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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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 / 고등학교 한국사 시험 대비 : '제도'에 대하여 24. 고대국가의 형성 - '제도'에 대하여(2)

  이번 시간에는 고대국가의 성장 양상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사실 제도의 배경에 대해 이해를 시도해야 한다고 이전 시간에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고대사라는 것이 사료가 그렇게 막대하게 많은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고대사를 전공하시는 선생님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대부분의 사료들이 들어가 있는 상태입니다. 근현대사를 연구 하시는 선생님들은 아무리 많이 알아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을 겁니다. 고로 고대사는 외울 것이 교과서에서도 그리 많지는 않은 편입니다. 우리는 몇 가지 사실들을 중심으로 머릿속에 집어넣고, 당시 상황에 대해서 상상해보는 작업을 해보도록 합시다. 

  1. 부여 : 만주가 어디있을까요? 만주는 한반도 바로 위쪽 지역을 말하죠? 만주지역에는 유목의 전통이 강한데, 부여의 모습은 어땠을지 궁금하군요. 어쨌건 보통 생각하기로는 북쪽으로 갈수록 으슬으슬 춥지요. 그런데 사료를 보면, "동이 지역에서 가장 평창하고 토지가 오곡농사에 적합하다~"라고 나와있습니다. 즉, 농사짓기 좋고 먹고살 만한 곳이라는 이야기이죠. 거기에 더해 소를 죽여 굽을 이용하여 점을 쳤다고 전해지는데, 가축도 길렀나봅니다. 

  이 부여는 고조선 중에도 위만조선 시기에도 존재했다고 합니다. 아주 유서깊은데, 사실 삼국시대 들어서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아서 그렇지, 5세기 말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저 기록물이 부족했을 뿐이죠. 부여의 지도자는 1세기 초부터 '왕'을 지칭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보통 우리에게 익숙해서 그런지 '왕'은 항상 있었을 거라 생각하곤 하는데, 사실 왕이라는 존재가 등장하기까지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겁니다. 누군 바보라서 신하를 할까요? 그에 걸맞는 논리와 힘이 권력자들 사이에 갖추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물론 여느 왕처럼 명령을 내리면, 신하가 받들어 수행하는 형태는 아니었을 겁니다. 바로 각 부족들이 모여 왕을 선출하는 연맹왕국이었던 것이죠. 각 부족이 왕을 선출했다면, 사실 왕에게 실권은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것이죠. 부여의 연맹을 구성하는 부족은 마가, 우가, 저가, 우가라는 4개 부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어떤 세력을 또 왕으로 세웠을 것입니다. 고로 '5부족 연맹체'이자, (마-우-저-구) '사출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1세기에 이런 연합국가 단계에서 한창 번성하여 중국 사서에서도 몇 번을 등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3세기 쯤 되면, 선비족이라고 하는 말타고 다니는 양반들에게 크게 공격을 당했다고 합니다. 만주 지역은 유목의 전통이 흔하다고 했지요? 그렇게 점점 비실비실해지던 부여는 5세기 말에 고구려에 병합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끝끝내 부여는 왕이 그리 강한 상태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부여의 풍습을 살펴볼까요?

  1) 순장 : 먼저 '순장'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통상 순장이란 권력자가 죽으면, 그에 딸린 신하들이나 노비들을 묻는 풍습입니다. 부여에서는 권력자가 죽었을 때 어떤 이들을 묻었는지는 자세히는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쨌건 따라 죽는 이들은 참 불쌍하게 느껴지지요. 사람이 불쌍하지도 않은가? 분명히 인권침해이므로, 현대 전세계 어디에서도 행해져서는 안 되겠죠. 그러나 이런 일이 실현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일단 당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추적해보자면, 순장을 통해 '죽은 사람의 위상에 걸맞게 후한 장례를 치러준다'는 것입니다. 특히 시신을 얼음을 이용하여 잘 썩지 않도록 보존해가면서 장례를 치러주며, 그에 맞는 귀금속들을 옆에 놓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그 권력자에 속한 이들이기에 함께 묻어버리는 것입니다. 과연 이들을 생매장했는지, 죽여서 같이 묻었는지, 이미 죽은 이들을 묻은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생각해야 하는 점은, 어차피 권력자 아래에 있으면 죽을 운명인데, 어떻게 이런 전통이 유지될 수 있었을까요? 정말 사람들은 권력자가 죽으면, 기꺼이 죽어줬던 걸까요? 여러 가지 해석이 필요하겠지만, 최소한 그런 전통이 유지될 만큼 권력자와 그 아랫사람들 간에 끈끈한 유대가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형사취수제 : 형사취수제는 형이 죽으면(형사), 형님의 아내를 동생이 취한다는 것(취수)을 뜻합니다. 형님의 아내를 '형수'라고 부르곤 하죠?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형님의 아내가 동생이랑 결혼 합니까? 그리고 여자는 미쳤습니까? 누군가 그렇게 하도록 강제로 시키는 걸까요? 

  대개 형사취수제는 유목민족들이 혈통을 지키기 위한 풍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목민족의 특징이란 우리처럼 농사를 짓는 걸 기초로 하는 사람과는 정신세계가 다릅니다. 일단 농사짓는 사람들은 유산을 남겨줄 때 땅과 재산을 남겨줘야 하는데, 재산을 잘 물려주기 위해서는 우리 집안에서 누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장자상속이라는 발상이 그렇게 탄생했고, 조선 후기에 그렇게 강력한 규범으로 자리잡았던 것이죠. 물론 부여는 곧 유목민족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농반목의 문화에서 탄생한 부여 문화의 모습을 상상해낼 수 있어야겠지요.

  부여 문화의 일부를 이루는 유목문화란 어떤 모습을 보일까요? 유목민족들도 사실 각 집단마다 다를 겁니다. 예를 들어 유목민족을 연구하는 분들이 말씀하시는 몽골의 풍습은 막내가 재산을 물려받는 형식이었습니다. 유목민들은 항상 움직이고, 각 가정집들마다 이웃이 따로 없습니다. 항상 돌아다니니 우리 동네라는 개념은 거의 없는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주 처음보는 사람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전투에 참가하는 남자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아니면 가축을 몰고 다니다가도 불의의 사고로 죽을 수도 있죠. 길을 잃어서 다른 부족에 잡혀 새장가를 들 수도 있겠죠. 그래서 결국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재산을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막내아들이기에 이 아이가 유산상속 1순위입니다. 농경사회에서는 감히 형님의 아내와 결혼한다는 것을 꿈꿀 수 없지만, 유목적 전통에서는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죠. 물론 이건 몽골의 예시일 뿐이고, 고구려의 형태는 어떠한 것일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다만 전통적인 정주사회의 마인드로만 바라보기에는 참으로 어렵기에, 다양한 시각이 요구됩니다.

  어쨌건 결국 재산과 혈통을 지키기 위한 것이 형사취수제입니다. 부족에서 권위가 낮은 사람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권력자들에게 형사취수제는 더더욱 그런 의미가 강했을 겁니다.

3) 도둑은 12배 배상 : 도둑이 무언가 훔치면, 훔친 것의 12배를 갚아야 합니다. 그러려니 싶지만, 지금 관점에서 보면 통쾌하기도, 무섭기도 합니다. 12배를 갚지 못하면 분명 누군가의 노예가 될 것이니 말이죠. 최대한 빨리 이 분쟁을 끝내고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빠르고 강력한 문제해결을 추구한 것이죠.

4) 12월의 영고 : 영고는 12월의 제천행사입니다. 옛날에 외우기 힘들어서 '부여의 영고 = 부영고'라고 외웠던 기억이 나네요. 하늘에 대한 제사를 열고, 축제도 열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죄수들도 광복절 특사마냥 풀어주기도 했습니다. 

 

* 참고자료

송호정 외, <<한국고대사 1 - 고대 국가의 성립과 전개>>

2015 수능특강 한국사

유목민족의 풍습에 관해서는 - 이화여대 박민수 교수의 강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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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책 12법, 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05_0050_0040_0020_0010&whereStr=%40where+%7B+IDX_TITLE%28HASALL%7C%27%EB%B6%80%EC%97%AC+1%EC%B1%85+12%EB%B0%B0%27%7C100000%7C0%29+or+IDX_CONTENT%28HASALL%7C%27%EB%B6%80%EC%97%AC+1%EC%B1%85+12%EB%B0%B0%27%7C100%7C0%29+or+IDX_ALL%28HASALL%7C%27%EB%B6%80%EC%97%AC+1%EC%B1%85+12%EB%B0%B0%27%7C1%7C0%29+%7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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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법률과 풍속 (1) 법률  사회와 국가를 지속적이고 원만히 운영하기 위해서 국가는 강제적인 법을 제정하여 사회성원으로 하여금 지키도록 하기 마련이다. 고구려에도 물론 법이 있었으며,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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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장, 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05_0040_0030&whereStr=%40where+%7B+IDX_TITLE%28HASALL%7C%27%EC%88%9C%EC%9E%A5%27%7C100000%7C0%29+or+IDX_CONTENT%28HASALL%7C%27%EC%88%9C%EC%9E%A5%27%7C100%7C0%29+or+IDX_ALL%28HASALL%7C%27%EC%88%9C%EC%9E%A5%27%7C1%7C0%29+%7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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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장례는 제례와 함께 실생활에 영향을 많이 미쳤을 뿐만 아니라 일상 행동에도 제약을 많이 가져왔다. 어느 시대에나 사회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원리와 이에 상응하는 윤리관이 있어서 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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