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과 가야의 발전(4) - 신라]
신라는 동해안의 진한에서 나왔다고 했지요. 신라의 기원은 진한 소국 중 하나인 경주 지역의 사로국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박씨, 석씨, 김씨 3개 성씨가 돌아가면서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당시 사로국은 변한 지역에서 김해지역 구야국(금관가야)과 교류 및 경쟁을 하면서 성장하고 있었죠. 금관가야(구야국)은 일본과 교류했고, 평양 지역에서 한나라 군현으로서 처음 출범하여 이어져왔던 낙랑군과 무역을 하면서 먹고 살았죠. 한편 마한에서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은 그런 상황 속에서 구야국을 그리 앞서나가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극적인 전환점으로, 3세기 후반부터 시들시들해지던 이 한군현 낙랑군, 대방군이 마침내 4세기에 백제나 고구려의 압박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변한 입장에서는 평양 지역의 이 한군현들은 좋은 무역 파트너였는데, 그 체제가 깨져버린 셈입니다. 그런 한편 진한 사로국은 그 틈에 성장을 하면서, 더더욱 대외활동도 활발해졌으니 어느 새 변한 구야국을 압도하게 된 것이죠. 변한 구야국이 점점 약해지니, '포상팔국의 난'이라고 하여 각종 소국들이 김해 구야국 등을 비롯한 지역에 대한 침략이 일어나는 등 아주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우리가 알다시피, 변한 지역 내에는 대가야, 금관가야 등 작은 정치체들이 서로 주도권 다툼을 벌이게 된 것이죠. 그 반면 진한의 사로국은 진한의 다른 소국들을 꾸준히 병합해 나갔습니다. 진한의 소국들을 복속하긴 했던 사로국은 시간을 들여 그 소국들을 자신들과 동화시켜야 했고, 마침내 6세기 초 지증왕 때에야 '사방을 막라한다'는 의미의 '신라' 국호를 사용하고, '신라 국왕'이라는 왕호를 쓰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4세기 이후로 어떤 내부적 정비가 있었기에, 사로국(훗날의 신라)은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사실 신라는 4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박, 석, 김씨 세 성 안에서 계승을 하며, 왕호 역시 떡을 깨물어 이빨 모양이 더 많이 찍힌 사람을 왕 정도의 직책인 '이사금'을 사용했습니다. 떡을 깨물어 왕을 뽑는다는 건, 사실 누가 뽑히든 그리 권력과는 상관 없다고 느껴서 그런 것이겠죠. 그런데 내물왕이라는 사람이 등장하자, 이 체제는 완전히 전환되어버립니다.
내물왕이 즉위를 할 때에는 이사금이 왕호니까, '내물이사금'으로 불렸겠죠? 여담으로 당시 발음으로, '내물'은 '나물'이라는 발음과 더 가까웠다고 합니다. 나물이사금이라. 나물이 떡을 깨물어 왕에 올랐나보죠? 어쨌건 이 사람 때부터 김씨 왕위 계승이 정착이 되었습니다. 신라의 왕 계보표를 보면, 신라 말기를 제외하곤 다 김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람 이름이 '김나물'은 아니었겠죠.
신라의 국왕, ko.wikipedia.org/wiki/%EC%8B%A0%EB%9D%BC%EC%9D%98_%EA%B5%AD%EC%99%95
내물 이사금은 신라를 김씨 왕조로 만든 왕입니다. 물론 내물왕 시기에 김씨가 왕위를 독점했다는 것은 드디어 떡을 깨물거나 그런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어떤 혈통이 왕위를 지켜야 할 만큼의 왕에게 권력이 생겼기 때문이지요. 왕에게 권력이 생겼다는 것은, 주변 세력을 복속해야 가능하다는 걸, 지금까지 학습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내물 이사금은 이사금이라는 왕호도 '으뜸가는 우두머리'라는 뜻인 '마립간'으로 바꾸었지요. <<삼국사기>>에서는 내물이사금으로 죽어 그 아들 대부터 마립간 칭호를 사용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내물왕 때부터 마립간 호칭을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지요. 다만 내물왕 당시에 권력강화가 눈에 띠게 발견되었고, 왕실 무덤 양식도 거대해졌으니 그 칭호도 걸맞게 바뀐 것이라 판단하여, '내물마립간'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지요.
물론 이 때는 권력 아래 신하들을 두어 일사분란하게 나라를 통치하는 첫걸음이라고나 할까요? 마립간이 왕의 권위를 보이는 왕호이긴 하지만, 아직 그렇게 각 지방의 지배세력들이 말을 잘 듣지는 않았겠죠. 아직 지방에 행정 공무원 격인 지방관들을 파견할 정도로 간섭하지 못했으니 말이죠.
이렇게 성장하고 있는 이 때 내물왕 시기에도 위기를 맞습니다. 바로 왜구들이 쳐들어온 것이죠. 그때 내물마립간이 도움을 요청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광개토대왕이었습니다. 아니, 만주벌판을 달리고 있어야 할 광개토 대왕이 왜 남쪽으로 내려왔나요? 남쪽으로 내려온 건 그 아들 장수왕 아닌가요? 저도 고등학교에서 암기할 때까지는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은 남진정책이고, 광개토대왕은 만주 위주로 달렸다고 외웠지요. 광개토대왕에 대해서는 조금 후의 강의에서 다룰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고구려와 백제는 당시 매우 앙숙이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를 살펴보면, 고구려에서 백제 사람들을 잔인한 놈들이라며 '백잔'이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한편 신라는 그 싸움에 끼어들어 큰 공을 세우거나, 중재를 할 만큼 큰 국력을 가지고 있지도 못했습니다. 4세기의 신라는 아직 약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백제는 고구려에게 완전히 밀리고 있었습니다. 백제 내부에서는 왕위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거기에 군림해서 백제 왕이 잘못했다고 빌면서 노객이 되겠다고 했지요. 노객이라는 말이 그 당시의 뉘앙스를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노비 노, 손님 객자를 쓰니 아마 부하나 수하보다는 좀 더 굴욕적인 말이겠지요? 광개토대왕은 그 정성을 갸륵히 여겨 백제 왕자를 고구려에 인질로 잡아가는 걸로 아량을 베풀어줍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신라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골칫거리인 왜구들을 격퇴해달라고 구원요청을 한 것입니다. 왜구들은 당시 옛 변한 지역의 나라들과 전통적으로 교류를 해 왔던 한편, 신라에게는 적대적이었던 것이죠. 광개토대왕은 신라의 도움을 주러 내려갔고, 왜구들을 쫓아냈지요. 왜구들은 한반도에서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변한지역의 가야에 피신을 했지만, 광개토대왕의 군대는 그곳까지 추격을 해 왜구를 섬멸하려 했지요. 그 과정에서 금관가야 지역이 큰 타격을 입고 가야 연맹이 대가야 지역으로 주도권이 넘어가게 됩니다.
한편 그 여파로 신라에서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간섭을 받게 되는데, 신라 쪽에서도 광개토대왕에게 많이 고마웠나봐요. '호우명 그릇'이라는 유물도 만드러졌지요. 호우명 그릇은 청동 솥인데,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라고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고구려에서 주조해서 신라에 하사한 것인지, 신라에서 만든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호우명 그릇이 신라 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최소한 고구려가 신라에 정치적 간섭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참고자료
송호정 외, <<한국고대사 1>>, pp.9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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