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과 가야의 발전(6) - 삼국의 고분 양식에 대하여]
* 삼국의 고분 양식
각 나라의 무덤 양식은 해당 나라의 문화를 알려주는 주요 단서입니다. 그 이유를 몇 가지 들자면, 그저 시신을 묻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귀하게 여기고 있는 물품까지도 함께 무덤에 넣어놓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무덤 모양은 왜 이렇게 만들었고, 왜 이런 물건들을 넣어놓았는지 당시 사람들이 굳이 언어로 기록을 남겨두지는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조상님들 묘지가 왜 그런 모양인지 굳이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무덤만큼은 참으로 그 당시로서는 당연한 전통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지금 그나마 남아있는 거대한 무덤들은 당시 유력한 이들의 무덤일텐데, 그렇다면 그 당시에 향유하고 있던 문화의 양상을 무덤을 통해 엿볼 수 있는 것이죠.
[전기]
고구려 : 돌무지무덤=적석총(장군총 등)
현재 중국 지린성(길림성) 지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장군총은 계단 모양으로 돌을 쌓은 모양입니다. 돌무지라는 것은 돌 더미라는 뜻입니다. 마치 피라미드의 윗 부분을 잘라놓은 것 같은 모양 같기도 합니다. 왜 굳이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었을까? 학자들도 이런 질문들을 많이 던지긴 했지만, 그 결론은 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 돌무지무덤 양식은 3~4세기 즈음에 다른 양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백제 : 돌무지무덤=적석총(석촌동 고분, 고구려의 영향)
백제 초기의 대표적인 무덤은 서울 석촌동에 있는, '석촌동 고분'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고구려의 계단식 돌무지 무덤 양식과 마찬가지로 석촌동 고분의 무덤은 계단식으로 세운 돌무지 무덤이죠. 백제의 온조집단이 고구려에서 탈출해 나왔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고구려와 문화적인 공통점이 백제 초기에 보였다는 것이죠.
신라 :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천마총 등, 많은 껴묻거리)
신라 초기의 대표적인 무덤은 천마총이죠. 천마총은 돌무지 덧널 무덤이라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일단 돌무지 모양이라는 것은 알 수 있지요. 그런데 '덧널'이라는 것은 뭘까요? 일단 우리는 널무덤과 덧널무덤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널무덤은 시신을 넣는 관과 같은 상자입니다. 그렇다면 그 상자는 크기가 작고, 옮겨 묻는 게 비교적 쉽겠죠? 덧널은 '널'을 넣는 상자 격의 널입니다. 그러니까 그 규모는 '관'보다는 '방'에 가깝겠지요. 굳이 이 덧널의 기능이 무엇이었느냐고 할 때에 무엇이라고 대답하긴 어렵지만, 이 덧널 안에는 널과 함께 여러 부장품들을 넣었습니다. 다시 말해 시신을 넣는 널과 함께, 돌아가신 분께서 저 세상으로 가져가실 여러 귀한 물건들을 넣어놓았다는 것이죠. 이런 부장품들을 '껴묻거리'라고 합니다.
결국 돌무지 덧널무덤이라는 무덤은, 커다란 나무 곽을 돌로 감싸고, 그 위에 흙을 덮은 모양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돌을 쌓았기에 '적석', 그리고 나무로 된 곽을 쓰기에 '목곽'이라고 하여, 적석목곽묘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사실은 고구려가 3~4세기에 초기의 무덤 양식인 돌무지무덤에서 다른 형태로 전환되는 한편, 신라는 4세기 전후로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왕호가 전환되는 그 쯤에 돌무지 덧널무덤이 주류가 됩니다. 상대적으로 신라의 집권은
[후기]
고구려 : 굴식 돌방무덤(벽과 천장에 벽화 제작)
3~4세기에 굴식 돌방무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한사군 축출 과정에서 그곳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물론 내재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겠지요. 변화하는 데에 어떤 이유가 있든 간에, 양식이 크게 변했습니다. 굴식, 즉 들어가는 데에 동굴처럼 들어가는 입구가 생겼다는 것이죠. 이전까지 돌무지 무덤은 들어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굴식인 이 무덤에 돌방까지 있답니다. 돌방이 있다는 것은 튼튼한 벽과 공간이 있다는 것을 뜻하지요. 그래서 그 벽에는 벽화가 그려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벽화는 매우 중요한 역사연구 주제인데, 무덤이 만들어질 당시에 사람들이 익숙한 모양새로 사람을 그려놓았을 것입니다. 북한에서 평양 지역과 그 인근에 고구려 무덤들 중에 안악 지역의 안악 3호분이 유명합니다.
한사군인 낙랑군이 무너지고 그 인근을 백제와 고구려가 점령해나가던, 고구려에서는 고국원왕이라는 왕이 있었지요. 이 고국원왕 때에 안악 지역에 중국 출신 동수라는 사람의 무덤을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무덤 벽에서 중국 풍의 벽화가 그려진 채로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안악 3호분에서도 또한 중요한 특징으로 지적되는 것이 천장이 점점 작은 크기의 마름모를 큰 마름모 안에 넣어 만드는 '모줄임천장'입니다. 안악 3호분의 모줄임 천장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모줄임천장 양식이라고 하네요. 안악 3호분에서 발견되는 것 같은 고구려 특유의 이 모줄임천장을 사용한 굴식 돌방무덤 양식은 훗날 발해의 정혜공주묘 발견되지요.
백제 : 굴식돌방무덤, 벽돌무덤(중국 남조의 영향, 무령왕릉이 대표적)
백제는 4세기부터 일찍이 성장하면서, 고구려의 4세기를 이끈 고국원왕을 평양성에서 전사시킨 바가 있었죠. 왕을 잃고 흔들리던 고구려가 내부기반을 다시 다지고 5세기에 급격히 성장하는 바람에, 백제는 도리어 크게 타격을 입게 됩니다. 백제는 고구려의 공세에 밀려 결국 본거지인 서울 주변을 고구려에게 내어주게 되고, 웅진(오늘날의 공주 지역)으로 도읍을 옮기게 됩니다. 그 때부터 고구려와 비슷했던 돌무지 무덤 양식은 사라지고, 마찬가지로 직사각형의 돌방 무덤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당시 중국에서는 한창 남쪽과 북쪽의 왕조가 나뉜 상황이었는데, 한반도 남쪽에 있었던 백제는 남조와 주로 교류를 했습니다.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벽돌무덤을 만들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무령왕릉이지요.
신라 : 굴식 돌방무덤
신라 역시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을 받으면서, 나름대로의 무덤 양식을 점점 변화시켜나갔습니다. 다른 삼국에 비해 늦은 시기인 6세기에 들어서서 고구려의 영향을 특히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경주를 중심으로 돌무지 덧널무덤보다는 돌방무덤이 선호됩니다. 역시 이런 무덤 양식의 변화가 일어나기까지는 또 지배층이 한 층 더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음을 지적할 수 있을 겁니다. 율령의 반포, 불교의 공인 등 법흥왕의 업적은 당시 신라의 왕권이 점점 강성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지요.
* 참고자료
2015 수능특강 한국사
옥재원, <신라 적석목곽묘의 조영 양상과 권력구조의 변동>, <<역사와 현실>> vol106, 한국역사연구회, 2017.
이남석, <고구려와 백제의 고분문화>, <<고구려발해연구>> 20, 고구려발해학회, 2005.
신라고분, 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2805
안악 3호분, 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868
'덧널', 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5454
고구려 벽화 고분, contents.history.go.kr/front/kc/main.do?levelId=kc_r10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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