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원주 민주화운동] 서론 - ‘계’의 전통과 '봉건성'(2)
(* 본 연재물은 전적으로 취미와문화의 생각이 반영된 것으로, 충분히 비판 받을 수 있는 문서입니다. 아직 거친 아이디어 수준이기에 여러 비판이 필요한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은 농민 운동가들의 ‘농촌 사회를 민주화시킬 것’이 라는 의욕을 돋웠다. 그들은 민주화를 추진하고 현존하는 권위주의에 저항하기 위 해, ‘권위적인 것’을 규정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현존하는 권위주의의 악 덕을 역사 속 전근대적 ‘악습’들에서 찾아내었다. 가령, ‘동계(洞契)’는 1960년 대부터 ‘전근대적인 것’으로서 협동 조합론의 도전을 받아왔던 공동체였다. 사실 동계는 주민들 간 관계를 대변할 뿐이지, 그것의 존재함으로써 마을이 권위주의적 으로 고착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에서 6.25 전쟁 전후의 동계의 목적은 같았지만, 주도자의 계층은 완전 히 달랐다. 대성집안(양반)은 6.25 전쟁 이후 급격히 세를 잃었으며, 동시에 동계의 주도권을 잃어 버렸다. 기존의 동계는 유야무야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간현리 동계의 목적, 즉 ‘상(喪)이 날 때 상 여(喪輿)를 드는’ 공동체를 꾸리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계를 구성하였다. 양반의 대토지 소유는 어느 정도 해체되었으며, 동계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양반 대신 ‘상여를 들었던’ 이들이 되었다.
하지만 농촌 민주화 운동가들은 ‘계(契)’는 마을사람들의 봉건적인 정신을 공동체화한 것이며, 그 공동체가 마을의 질서를 지배하 고 있다고 믿었다. 또한 그 악습 위에 또 다른 악인 관제 기구가 농촌 지배에 가담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1974년 5월 18일 가톨릭농민회 상임위원회에서 위원들이 ‘농촌 민주화’를 주제에 부합하다고 판단하여 『농촌청년』 26호에 기재한 규암 농민회의 논설은 다음과 같다.
… 민주적이란 말을 우리는 인격 간의 평등화라는 말로 해석했다. 그리고 평등화란 권 리 취득의 기회가 균등하고, 가지고 있는 권리와 의무는 비례해야 한다는 것으로 판단했 다. 따라서 권리는 많은 자가 의무는 적든가, 권리도 없는 자가 의무만 많은 현상을 비민 주적 표본이라고 본다. … 이런 원칙 밑에 관찰한 결과 우리의 주변에는 너무나도 많은 비민주적 요소가 잔류해 있음을 발견했다. 즉 적어도 부락 단위의 하위급에서는 아직도 봉건체제가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는 것을 본 것이다. 이러한 부락 단위에서 조직되는 단 체들을 보면 대개 농협같은 관(官) 주도 단체나 또는 재건청년회 같은 관책(官策) 단체거 나 4H 클럽 같은 자치단체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분류에도 불구하고 모든 조직 은 실질적으로 대동계(大同契)라는 봉건적 계조직을 모체로 하고 있다. 즉 대동계의 핵심 맴버의 지지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각 단체의 임원 구성은 서 로 엇비슷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운영방식도 대동계의 방식과 대차가 없다. 그러한 대 동계는 유지라고 불리우는 지도구룹에 의해 거의 전체적으로 운영된다. … 이상의 실태로 보아 우리나라가 참으로 민주화 하는 데는 상위급이 아니라 하위급, 즉 부락 단위의 민주 화가 선행돼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부락 구성원 개개인의 가치관을 변모시킴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믿는 바이다. … 인간의 가치관을 변모시키는 요인은 종교 에 있고, 따라서 이런 운동은 민주적 선악관을 가진 종교에서 구할 수 있으며, 그런 종교 로서 기독교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리에 관계없이 기독교가 사회의 가치 관을 지배하고 있는 서구 사회에서 가장 민주적인 표본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 다음은 종교가 아니면서 즉 간접적 방법으로 민중을 계몽하는 방법으로 교육이 있다. 그 중에서 「민주주의」라는 학과목의 숙제를 해오지 않았다고 매를 때리는 학교교육은 말할 것도 없이 실패한 대표적 경우이고, 성인교육의 한 방편으로 신용협동조합 운동이 있었다. 즉 교육은 집회가 필요하고 집회를 위해서는 금전적 이해(利害)를 결부시키는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본 것이 신용 협동 조합 운동이다. … 우리나라가 참으로 민주화 하는 데는 상위급이 아니라 하위급, 즉 부락단위의 민주화가 선행돼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 다. 그리고 그것은 부락 구성원 개개인의 가치관을 변모시킴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믿는 바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운동은 기왕에 시도됐었는데도 모두가 실패하고 만 것 같다는 데 있다. 그 가운데는 기독교 운동도 있다. 즉 인간의 가치관을 변모시키는 요인은 종교 에 있고, 따라서 이런 운동은 민주적 선악관을 가진 종교에서 구할 수 있으며, 그런 종교 로서 기독교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리에 관계없이 기독교가 사회의 가치 관을 지배하고 있는 서구 사회에서 가장 민주적인 표본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기독교도 동양에 와서는 민중의 가치관을 변모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민중의 가치관 과 타협해버린 느낌인 것이다. 즉 비교적 보수적이라는 가톨릭은 말할 것도 없고, 개방적 이라는 개신교 쪽에서도 서구 기독교보다 위계질서가 훨씬 견고하며, 매사를 신의(神意)에 맡겨버리는 버릇이 있는 것이다.
출처 : 규암농민회, 「봉건적 조직 - 대동계(大同契)」, 『농촌청년』 1974년 26호, 한국가톨릭농민회, 1974. pp.5∼6;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 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211412.
이 글에서 규암 농민회에게 ‘기독교’란 봉건적인 질서 아래에 있는 농민들을 민주주의로 인도하는 도구이다. 그들은 억압적 행정 체계가 농민들의 ‘봉건성’에 기생하는 것으로 규정하기 위해, 전통적인 조선 시대의 권력 체계를 끌어와 현존하는 악습으 로 규정하였다. 즉, ‘후진적 농촌은 후진적인 유신 체제의 제도들에 억압당한다’ 는 전제가 필요했고, 양자를 ‘권력 지향적인 것’으로 인식하여 그것들을 동일시 하였다. 종교는 ‘민주주의적 표본’으로서 박정희 정권의 것보다 더 ‘민주주의(선 진)’적인 새로운 국가상을 위해 봉사하며, 신용 협동 조합을 통한 ‘민주주의적 모 임’ 역시 그러했다. 그런데 ‘교육은 집회가 필요하고 집회를 위해서는 금전적 이 해를 결부시키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진술에서 알 수 있다시피, 민생의 문제는 일단 뒷전으로 밀린다.
* 참고자료
. 스즈키 에이타로(鈴木榮太郞), 『朝鮮農村社會踏査記 - 朝鮮の織物に就て』, 景仁文化社, 2005, pp.86∼87. 해당 원문의 부분을 번역한 것으로는 다음을 참조. 장영민, 『원주 역사를 찾아서』, 景仁文化社, 2004, pp.324∼32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 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211412]
한국가톨릭농민회, 『상임이사회 회의록(’72∼76)』, 한국가톨릭농민회, 1976, 등록번호 00208553, 1974. 5. 18일자 상임이사회 회의록.
규암농민회, 「봉건적 조직 - 대동계(大同契)」, 『농촌청년』 1974년 26호, 한국가톨릭농민회, 1974. p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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