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과 좌우익 세력의 갈등 - 8.15 광복의 배경 ; 1. 미국의 입장]
그 이전까지의 경과 ) 2차 세계대전 발발 - 파시즘 대 반 파시즘 구도
-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
- 1940년 9월 독일-이탈리아-일본의 3국 동맹 공식화.
-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 발발.
- 파시즘(일본, 이탈리아, 독일) 대 반파시즘 구도의 형성
미국의 시각) 동아시아 전선에서 미국의 정국 주도
- 대공황기 이후 세계질서 유지에 노력하기 시작한 미국은, 일제의 대륙진출을 주시하고 있었음.
- 가능한 일본과 전쟁을 꺼렸던 미국은, 1930년대 중반까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고는 있었음. 1933~1936년에 서울에서 미-일 외교관계 하 서울주재 총영사로 근무하다가, 1940년대 초 태평양전쟁기에 국무성 내 극동국 및 외교정책자문위원회 내 영토소위원회 등에서 일했던 랭던(William R. Langdon, 국무부 극동국 관리*)의 보고서가 대표적인 예.
* 미합중국 국무부 극동국 : 미합중국 국무부는 미국정부에서 외교 정책을 담당하는 중앙행정기관이다. '극동'은 러시아 동쪽 끝 지방까지를 포함하고, 동아시아~동남아시아를 섞어 부정확하게 지칭하는 용어이다. 극동이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중국~한국~베트남 등을 포함하는 동아시아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위키백과:"미합중국 국무부", "극동")
- 당시 미국은 대개 일본에 대하여 대항하는 이들 중 '사회주의' 세력을 두려워했고, 미 외교관들은 식민지 한국 문제에 있어서 대개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다. 외교관들은 한국인들을 대개 '수동적이고 무능력'하다고 보았다. 다만 미국이 필리핀 식민지 운영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 일제의 통치 방식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하긴 했지만 결국 지배하는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 미국이 식민지 해방과 독립을 처리하는 주도자로 나서게 된 시기는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습 전후로 보인다. 미국이 한반도 해방 문제를 다루는 것은 물론 동아시아 질서 재편 과정에 대응하는 선상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태평양 전쟁 이후로 민족운동가들의 활동이 다시 활발해지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재미 한인세력도 임시정부 승인과 한인 무장단체에 대한 군사지원을 위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미국의 입장에서도 미-일 간 관계가 나빠지면서, 새로운 정보원으로서 해외 한인세력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한국 문제 처리에 있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인들을 대표한다고 보지 않았다. 해외 한인세력들이 임정을 승인해달라 요구했지만, 공식적인 미국의 지지는 없었다.
- 랭던은 1940년대 초반 국무성 내 극동국에 근무하면서 재미 한인들, 중경 주재 미 대사관 등 정보원들을 통해 임정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1930년대 한국에서의 경험이 인정되었던 것인지, 미국의 전후 대한정책 구상과 관련된 실질적인 업무에도 참여하면서 '한국통'으로 인정받았던 것 같다.(김지민, p.163)
- 그런 배경 아래 랭던은 1942년 2월에 <한국 독립문제의 몇 가지 측면들>(소위 '42년 보고서')이라는 문건을 작성했다.
미국 외교관 랭던의 42년 보고서에서 한국인에 대한 인식
- 행정의 경우에서처럼, 일본인들은 금융업, 기계제조업, 공학, 수출입, 대량유통, 해운 부문 등의 모든 경제영역에서 한국인들을 배제해왔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근대경제에 대한 훈련이 되어있지 않다.
- 한국인들의 정치적 경험부족과 무방비 때문에 한국인들이 우선 그들의 나라를 어떻게 운영하고 재침략으로부터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더욱이 적어도 한 세대동안 한국인들은 열강으로부터 보호, 지도, 그리고 근대국가로 나아가는 데 대한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 미국은 적어도 중국이나 영국으로부터 동의없이 서둘러서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다든지 한국의 어떤 재야단체를 한국의 임시정부로 선언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 현재도 그러하지만 앞으로도 한국의 일부 그룹은 우리에게 졸라댈 것이다. 한국독립에 관한 우리의 입장에 대한 정확한 태도표명과 어떤 특정한 그룹을 한국의 임시정부로서 인정할 것에 대한 요구 등이 그것이다. 우리가 굳이 독립에 대한 그들의 희망을 막을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이런 일들에 성급하게 어떠한 약속도 해서는 안 된다.
출처 : 36. 미국 국무부내 관계자들의 한국관련 정보 공유와 관련한 서신, 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ij_020_0020_00360, 2021-01-05.검색.
'한국통' 랭던의 보고서는 미국 정부가 한국에 갖는 인상에 대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일본의 패전과 해방, 그리고 그 이후 미군정 시기까지도 한국인에 대해 미국이 이렇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즉, '한국인들은 스스로 행정, 정치, 경제 등을 꾸려나갈 역량이 없다'는 시각으로 한국인들을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한반도가 지리적으로 미국 입장에서 그렇게 핵심적이고 중요한 부분이었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뭐라 확답을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이때까지는 일본에 대항하는 전진기지 격이 한반도라고 인식된 것 같다. 한반도가 서둘러 독립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일본과 그 동맹국에게 웃음거리가 되거나, 미국의 동맹국에게 불편을 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 것을 보면 말이다.
* 참고자료
김지민, <해방 전후 랭던의 한국문제인식과 미국의 정부수립 정책>, <<한국사연구>> vol.2002. 한국사연구회, 2002.
36. 미국 국무부내 관계자들의 한국관련 정보 공유와 관련한 서신, 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ij_020_0020_00360, 2021-01-05.검색.
'역사 > 한국 현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8.15 해방의 배경 - 2. 한국의 저항 (0) | 2021.01.06 |
---|---|
8.15 광복의 외적인 배경 - 1. 미국의 시각 (2) | 2021.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