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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짧은 글

계몽이란

by 취미와 문화 2021.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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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이란 - 칸트의 입장에서 친근하게
계몽이라는 개념이 한국사나 세계사 공부할 때에 자주 나오지만, 그 뜻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국어사전적인 정의를 보자 :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침.(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한편 수업상에서 계몽(啓蒙)의 한자를 뜻풀이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가르칠(훈계할) 계, 입을(덮을) 몽. 가르침을 내려 (담요처럼) 덮어준다 뜻이다. '꿈에서 깨우다'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꿈 몽(夢)과는 구별을 해야겠다. 몽은 왕이 피난을 갈 때, 먼지를 덮는다 하여 ‘몽진(蒙塵)’이라고 할 때의 한자이다.
계몽은 가르침을 주는 것이 맞다. 그런데 민중들이 어떤 상태이기에 어떤 가르침을 준다는 것일까? 계몽이 전제하는 것은 '민중이 우매'하다는 점이다.(글쓴이가 감히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고.) 그 '우매함'의 기원이란 꽤 가까이에 있다. "뭘 그렇게 따지냐?" 따지지 말라. 이게 이성과 지성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말이다. 이건 개 돼지 운운하는 사회 지도층 뿐만 아니라, 사회 각 계층 모두가 입에 달고 있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왜? 어째서 그렇지?' 계속해서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그건 왜 알고 싶은 건데?'라며 그 물음의 필요성을 부정하게 된다. 사실은 그것은 모른다는 것을 회피하기 위함이다. 모름은 당연시된다. 당연히 모르는 것이 세상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모르지만, 모르는 것을 외면한다. 생각은 멈추고, 군중심리에 끌려다니다가 나는 민중이요, 아무런 힘이 없는 민중이라며 책임을 회피한다. 나의 행동은 나의 행동일 뿐인데, 군중 속에서 나의 존재를 지우고 남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다시 말해, 유아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의 사회에는 일정 체계라는 것이 있다. 동사무소가 있고, 시청이 있고, 도청이 있고, 그것을 모두 포괄하는 행정부 전체가 있다. 그것을 부정하면 행정이 무너지고 현재 우리 국가는 유지될 수 없다. 지금까지 다루었던 베버의 이론에 비추어보자면, 공무원들이 자유랍시고 스스로 정부의 일을 비판하는 일은 결코 옳지 않다. 실제 정부의 일을 비판하면 공무집행이 늦어진다는 점에서는 불합리한 것이 맞다. 국가가 무언가를 추진하려 할 때에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공무원의 충실한 협조가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공무원들도 가정에서는 정치적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 때에는 공무원의 공적(정치적) 이성이 아니라, 사적으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직자는 어떠한가? 성직자는 보통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관념이 역사적으로 형성되긴 했지만, 민주화운동 같은 예외 사항은 항상 존재했다. 성직자로서 정치를 맡는다면 자유의 엄청난 통제가 될 것이며, 문화 전체가 제한될 것이다. 물론 민주화운동에서 성직자들이 뛰어드는 데에는 한계가 분명했다. 성직자들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민주화운동에 참여를 한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막을 수 없다. 국가 행정 조직 바깥에 있는 개인의 공적인 행위는 규제되어서는 안 된다. 
전 국민들을 군대처럼 통제한다면, 개인의 공적인 행위는 제한된다. 필자가 생각하는 한, 자유주의의 핵심이 그것일 것이다. (두산백과 : "개인의 자유와 자유로운 인격 표현을 중시하는 사상 및 운동으로 사회와 집단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본다.")  대한민국의 분단 상태가 만들어낸 기이한 우파, 즉 자유주의를 부정하는 '우파'는 사실 좌파에 가깝다고 본다. 자유민주주의는 사회적 전시 상태가 아니라, 작은 정부의 적은 통제를 지향한다. 
당연히 신분 구조가 있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자유가 제한된다.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가 국민들에게 강요되고, 국민들을 교육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자유를 제한한다. 다만 계몽주의가 형성될 시에는 신분 구조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했으리라. 서양 전통 봉건사회에서 성직자와 영주 간에 있었던 그 정치적 연결을 생각해보면, 성직자도 공무원들도 모두 민중들의 공적 자유를 제한했다는 생각까지 나아가는 데에 어려움이 없다. 사적인 부분은 교회가, 공적인 부분은 신분제가 가로막고 있었으니. 근대에 성직자, 종교는 사회를 논하는 영역에 성직자로서 간섭할 수 없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쌓은 업보때문에 그런지, 인간의 합리성이 발달한 것인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제 종교 그 자체가 정권을 장악하는 건 퇴행적이라고 느껴지지 않겠는지.
군주가 있을 시절에 군주는 민중의 "뭘 그렇게 따지냐"라는 사고방식 위에 존재했다. 그래서 군주가 무얼 결정하면 민중은 그에 따랐다. 하지만 '국민의 필요가 세운 군주'라는 관념이 유럽에 세워지고 나서는, 군주가 군주로서 있을 정당성은 매우 모호해졌다. 실제 국민이 그렇게 생각했든, 아니었든 간에 말이다. 군주는 헌법학자도 아니고, 군사학자도 아니고, 외교학자도 아니고, 정치학자도 아니니 말이다. 계몽군주라는 말은 최소한 그런 애매한 지위에 있는 인간이다. 일반 민중의 공적인 이성을 사용할 기회를 기꺼이 주는 이가 계몽군주이자, 종교상 문제에서 완전한 자유를 제공하는 이가 바로 계몽군주니까.
결론적으로 계몽이란 국민들이 (특히 종교에 있어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권리가 인정되며, 개개인의 공적인 행위가 인정되는 사회를 만드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 칸트의 입장을 참고한 자료 : 임마누엘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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