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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독/막스 베버

막스 베버의 합리화 : '가치합리적' 행위와 '목적합리적' 행위

by 취미와 문화 2021.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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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글쓴이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주로 일상적인 용어를 사용하려 했고, 개념상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류가 발견되는대로 수정을 가하니, 만약 참고를 한다면 비판적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가치합리적' 행위와 '목적합리적' 행위

1. 가치합리적 행위 : 윤리, 심미, 종교적인 행동들 자체의 가치에 대한 의식적 믿음에 의해 촉발되는 행동을 말한다. 개개인의 시각에서 보자면, 어떤 현상을 보았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간이라면 ~을 해야 한다.' '사람이라면 ~이어야 한다'는 식의 가치관과 연결이 된다. 일상 생활에서 이 신념을 바꾸기 위해 설득을 하곤 하며, 실제로 그들은 설득의 힘을 믿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중독이라고 해야 할지, 성향이라고 해야 할지 매우 미묘한 것이다. 가치관이란 인생의 과정 속에서 어떤 기질이 발현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제일 적절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남들의 가치관에 대해 너무 가벼운 것으로 평가한다. "얘는 아직 뭘 몰라."라는 말처럼 말이다. 그러나 가치는 그 가치를 가진 사람과 공동체가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가치관은 인간이 이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개발되는 것인데, 베버는 구원종교의 기원을 그렇게 보았다. 즉,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너무나도 불합리하여, 나쁜 놈들은 잘 살고, 착한 놈들은 못 사니, 차라리 내세관을 개조해 나갔다는 것이다. 물론 베버는 성경 자체가 인간의 욕망을 결집한 결정체라고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서 파생되어 나온 인간의 '교리'와 내세에 대한 이미지는 인간의 영역으로서 형성되어 왔다. 착한 놈은 천국에 가고, 나쁜(믿지 않는) 놈은 지옥에 가는 아주 단순한 도식은, 인간의 현세에서 아주 매력적인 합리화이며, 동시에 현세의 삶에 만족하기 위한 최적의 수단이었다.

  가치합리성은 결과보다는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성경을 본다. 성경을 읽어주는 성직자들은 "~하라"는 설교를 해 주신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라고 받아들이지만 사실 성직자들은 우리 행위에 결과를 책임져 주는 사람이 아니다. 행위의 결과는 가치에 영향을 끼치겠지만, 그러기에는 성경과 교회가 크리스챤의 마음 속에 자리한 위치는 너무나 공고하다. 자신이 하나님의 시험에 들었지만, 끝끝내 행복한 결말을 맺으리라 믿거나, 하나님의 뜻이 있다거나 세계관 내에서 또 다른 해석을 찾아낸다. 이렇듯 성경은 행동의 원칙을 제시하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으며, 그런 크리스트교 같은 가치관은 충분히 유지될 만한 원동력이 존재한다. 

 크리스트교 정도로 강력한 가치관의 종류는 사실 인간의 숫자만큼 있다. 세상에는 크리스트교만 있는 건 아니다. 그런 가치관들도 동일하게 개개인에게는 소중하다. 인간은 행동의 결과 믿음을 얻지만, 믿음을 지키기 위해 행동을 하기도 한다. 크리스챤이 순교를 하듯, 다른 가치관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다. 믿음은 인간의 인생과 함께하여 각자 인생에서 마주치는 고난들을 이기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그런데 그 믿음이 부서지는 순간, 지금까지 이겨냈던 그 고난들은 모두 거짓이 되어버리고, 인간의 인생은 덩달아 거짓이 되어버린다. 가치합리성은 그렇게 공고해진다.

 

2. 목적합리적 행위 : 인간은 어떤 가치에 의해 행동하기도 하지만,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동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예시는 돈을 벌기 위해 직장을 다니는 일이다. 가끔 직장이 우리의 가치관과 맞지 않을지언정, 돈을 주긴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모른 척하고 다닐 수는 있다. 그런데 만약 직장에서 돈을 주지 않으면 직장을 그만두거나 노조를 만들 수 밖에 없다. 목적합리성은 우리의 목적이 연관이 되는데, 그 목적이란 우리의 현실적 삶에 너무나도 밀접하다.

 가치합리적 행위의 예시로 우리는 크리스트교의 예시를 보았다. 크리스트교에서는 아무리 개개인이 손해를 보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전히 종교를 지킬 수 있는 내적인 원동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목적합리적 행위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사회에 일자리가 부족하면, '부족한 일자리를 찾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고,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하면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그 책임사유를 개인이 내놓아야 한다. 크리스트교에서 성직자가 만약 교회를 통해 재산을 축적하는 것이 목적이거나, 교회를 키우거나, 아니면 마을 내 신자의 숫자가 부족함을 느끼게 될 경우, 기도를 통해 내적인 만족감("내적 자산")까지도 크리스트교라는 가치 외에 또다른 일정 목적을 띠게 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삶의 시간이 한정된 인간의 문제, 즉 현세적 문제이다.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 가치를 창출할 때, '가치가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가치합리적 행위는 무한한 원동력을 갖는 한편, 목적합리적 행위는 이 부족함에서 발동된다. "나는 ~을 위해서(목적) ~해야 한다(소명)."(글쓴이가 구분하였음.) 목적합리적 행위는 '~을 위해서(목적)'를 위해 '~해야 한다(소명)'을 조정한다. 가령 '행정적 편의를 위해서(목적) ~해야 한다(소명).'이라고 한다고 할 때에, 목적에 합당하게 선택된 소명이란 역사적으로 '공무원을 두고 상명하복의 체제로 부려먹는다'라는 것이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적의 방식이 무엇이냐' 고민하는 일, 최소 비용으로 최대 성과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일상적으로 '경제적인' 태도라고 이야기되지만, 엄밀히 말해 '경제'라는 용어의 범주는 넓으므로 '목적합리적'인 진술의 일부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 참고자료

막스 베버, <<경제와 사회>>

임의영, <관료제의 합리화 역설 : M. Weber의 고전적 논의와 U. Beck의 위험사회론을 중심으로>, <<행정논총>> 제54권 제2호,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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