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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짧은 글

'잘 사라지는 법'

by 취미와 문화 2021.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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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소중하지 않다. 혹은 소중하다. 전제가 되는 이 말은 참거짓을 밝힐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물어왔다. 사람은 왜 소중한가? 나는 왜 소중한가? 이런 질문이야말로 잘못된 것이었다. 인류는 소중하지 않다. 내게 소중한 게 마침 인류인 참일 뿐이다. 한편 인류는 흔해 빠졌다. 나도 흔해빠진 인류이다. 그게 가족 사회를 벗어난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전제여왔다. 한 학자가 말한 게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너는 그런 일 당할 일 없을 것 같으냐? 나중에라도 문제 생기지 않으려면 나를 돕는 게 신상에 좋을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이야말로 가족 바깥의 공동체를 이루는 요인 중 하나라고. 그런데 이제는 혼자서도 너무 잘 산다. 혼자 너무 잘 살다보니, 이제는 사고방식의 뉘앙스가 미묘하게 달라졌달까.

나는 한때 또래에게 "너는 피해를 끼치지 않아서, 싫지 않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순간 나에겐 그게 협박으로 들렸다. '피해를 끼친다면 너는 가차없이 내 친구 리스트에서 사라지리라'는 그런 협박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이 지금까지 인간관계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말을 입에 담은 것 자체가 오히려 순박하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피해를 끼치지 않는 인간'이란, 정말이지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그저 잘 이용되다가 잘 사라져주면 되는 그런 인간 말이다.

나는 '잘 사라져주는 법'에 대해서 꽤 오랫동안 고민을 해 왔다. 그리고 나도 좋아하던 누군가와 절연을 할 때에 '기억 속에서 사라져달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런데 그것 참 요상한 주문이었던 것 같다. 잘 사라지는 법이라니. 어쩌면 아무 탈 없이 살아가는 것이 '잘 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한때는 누군가 말한 '피해를 끼치지 않는 삶' 그 자체가 '잘 사라지는 일'이었다. 아무 감정도 소비시키지 않은 채로 나는 사회 속에 녹아들어, 공기처럼 존재해왔던 사람. 내게 다가와 감정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을 것 같은 사람. 또래들에게는 그게 나였다. 

그런 한편 '왜 나는 사라져야만 하는 인간인가. 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는가. 인류로서 나는 왜 소외되어 왔는가.' 그걸 찾아 맑스 읽기 동아리에 찾아 들어갔다. 그랬더니 중년의 여교수님도 나와 함께 고민하고 있었다. 거기에 위로는 있었지만 답은 없었다. 옹기종기 모여 외로움을 한탄하던 동아리 맥주파티도 이제는 꽤 멀어진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소중한 추억이지만 어느 새 난 조용히 잘 사라진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근 몇 년 동안 사회 속에서 '사라진다'는 게 꼭 서운한 일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사라진다는 게 어떤 특별한 사건도 아니고,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런 일상에 덤덤해지고, 사건 하나하나에 미련을 버려가는 게 어른이 되는 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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