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한국 고대사

1. 구석기와 신석기, 각종 도구들과 생활모습

by 취미와 문화 2020. 11. 25.
반응형

1. 구석기와 신석기, 각종 도구들과 생활모습

 

  안녕하세요. 여러분, 김궁핍(취미와 문화)입니다.

  오늘은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를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보통 한국사 공부를 할 때에 부푼 가슴으로 눈에 불을 켜고 책의 첫 페이지를 폅니다. 하지만 구석기 유물은 어떤 것, 신석기 유물은 어떤 것, 이렇게 구분하는 데에 하루가 다 가 버리죠. 특히 고등학생이라면 그 시간은 더더욱 아깝게 느껴질 겁니다. 어차피 시험 끝나면 다 까먹을 건데 말이에요. 어느 지역에 어떤 유물이 있고, 어떤 시대의 것인지 어떻게 영원히 기억하겠어요? 그건 천재들이나 그럴 수 있죠. 저를 포함하여 여러분의 대부분은 암기를 하라면 가슴이 턱 막혀버릴 뿐입니다.

  이제는 사실 한국사가 서울대를 가기 위해서 만점을 받아야 하는 과목이 아니죠? 필수과목으로서 목표한 점수보다 높게 나오면 되는 것이고, 다만 그 공부를 하면서 필요한 삶의 지혜를 얻어가면 될 뿐입니다. 역사는 어디에든 도움을 줍니다. 물론 역사 공부를 하다보면, 역사 학문 그 자체가 재미있기도 합니다.

 

  1. 구석기

  구석기 시대는 옛 석기 시대를 이야기 할 것이요, 신석기 시대는 그 후에 나온 석기 시대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결국 둘 다 돌멩이 가지고 생활한다는 점에서는 같아보입니다. 돌 모양 다른 게 그렇게 중요할까요? 물론 어느 시대에 어떤 석기 유물이 있었는지는 파악해놓는 게 좋겠죠.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이용하던 그 도구 자체보다, 그 도구를 사용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구석기는 돌로 깬 뗀석기를 쓰고, 신석기는 쓱싹쓱싹 다듬은 간석기를 쓰죠. 그렇다면 돌멩이 모양이 어떤 삶의 모습을 담고 있을까요? 물론 그 정답은 정해져 있지 않고, 어디까지나 해석의 영역입니다.

  우리가 책상 모서리에 허벅지를 찧으면 정말 너무너무 아픕니다. 뭐든지 뾰족하면 뾰족할수록, 단단하면 단단할수록 생물을 제압하기 쉽습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경험상 그걸 알고 있지요. 구석기 사람들이라고 그걸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무기를 그렇게 그럴듯하게 만들지 않고 대충 돌로 깨서 만들죠? 여러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동생활을 하면 매번 주먹 만한 돌을 가지고 다닐 수 없기 때문이죠. 구석기 사람들이 당시 백팩을 만들거나, 동물가죽으로 가방을 만들 여력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만약 가방이 있다면 고기를 넣어놓아야 일단 생존에 유리하겠죠. 무기도 마땅찮은 와중에 동물이 나타나면? 그녀석들을 잡기 위해 무기를 현장에서 급조해야 합니다. 그래서 손에 잘 잡히면서도 조금은 허접해보이는 뗀석기가 완성되는 겁니다. 아니, 한편으로는 당시 기술자가 아닌 사람이 무기를 만든다고 할 때에 나름대로 그럴듯하게 만든 것일 수 있습니다. 당시 살았던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그 칼이나 창 같은 무기를 본 적이 없을 테니까요.

  먼저 구석기 시대에는 연천 전곡리에서 나온 주먹도끼가 가장 유명합니다. 수능특강에도 교과서에도 단골로 나와 있지요. 아마도 아저씨들에게 '경기도 연천'이라고 함은, 군부대가 먼저 떠오릅니다. 북한과 아주 가까운 곳이지요. 그곳에는 미군도 주둔하고 있습니다. 1978년에 미국 군인분이 그 연천에서 데이트를 하다가, 그 커플이 돌을 하나 주웠는데, 그게 바로 '주먹도끼'였어요! 그때 고고학자분들이 엄청 놀라셨겠지요. 그 다음 해부터 연천에서 계속 땅을 파 봤더니 다양한 구석기 유물들이 나왔습니다. 연천 전곡리 유적은 대표적인 구석기 유적이 됐습니다. 

  이런 종류의 구석기 유물들은 한반도 바다건 내륙이건 골고루 발굴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도 평안도 상원에 검은모루 동굴이 대표적이고, 남한에는 막집으로 유명한 공주 석장리 유적, 흥수아이로 유명한 청주에 청원 두루봉 유적이 있습니다. 특히 청원 두루봉 유적에 '흥수굴'에 백골이 나온 것이 있는데, '흥수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여기에서 '흥수'는 발견자 이름입니다. 어쨌건 구석기시대 유적이라면 최소한 만 년 전에 이 아이가 매장이 되었다는 것인데, 사람 뼈가 그 정도로 잘 보존되었다는 것은 고고학계에는 아주 기적과 같은 일이었겠죠? 어쨌건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흥수아이가 누워있는 주변에 국화꽃가루가 검출이 되었대요! 국화는 지금도 장례식에서 사용하고 있죠? 물론 그 국화가 지금과 같은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시신 옆에 꽃을 떨어뜨려주는 마음을 우리는 어렴풋이 짐작을 할 수 있겠죠. 물론 당시에 가족이라는 의미는 잘 없었을테고,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불확실했을 테지만, 어머니는 굉장히 슬펐겠죠. 아이가 사후세계에서 꽃길을 걸으라는 의미인지, 마지막이라도 아름답게 끝맺자는 것인지, 어쨌건 당시 사람에게도 죽음은 굉장히 슬픈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석기인들은 그렇게 항상 죽음을 마주하고 있었을 겁니다. 지금 우리야 밥상에 고기가 없으면 입맛없다고 투덜대지만, 구석기 사람들은 어디 들판에서 따온 이상한 열매를 조심스레 먹어보거나, 운 좋게 만난 들짐승을 일단 잡아다가 불에 통째로 구웠을 겁니다. 호랑이를 만나면 도망가거나, 그저 죽는 거죠. 일단 잠 자는 동안 짐승을 피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해놓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동굴에 들어가서 입구에 불을 피워놓고 경계를 하고 있는 게 제일 안전하겠죠. 하지만 동굴이 어디에나 있는게 아니니, 임시로 평지에 막집이라도 지어놓아야 그나마 안전하겠죠. 참고로 막집은 평지에 임시로 지은 집을 말합니다.

  그런데 1만 2천년 전부터, 그러니까 한창 구석기일 때 지구가 급격히 따뜻해졌습니다. 언제부터 따뜻해졌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날씨가 따뜻해졌다는 이야기는 지구에서 사는 생물들이 엄청나게 변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맘모스를 떠올릴 때에 눈밭 위에 있는 모습을 떠올릴 수는 있지만, 풀을 뜯고 있는 맘모스의 모습은 좀처럼 접하지 못했습니다. 대개 날씨가 따뜻해져 작고 야들야들한 풀들이 잘 크게 되고, 토끼, 여우 같은 녀석들이 초원을 샤샥거리며 돌아다니게 된 것이죠. 이제 작은 동물들이 눈에 들어오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이제 주먹도끼만으로는 이 녀석들을 잡기 어렵습니다. 맨손으로 사족보행 동물을 잡을 수 있을까요? 아주 힘들겠죠? 그래서 던질 수 있는 무기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돌로 만든 창 같은 것이 그 때에 집중적으로 고안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제 구석기 후기에는 돌로만든 창 촉인 '슴베찌르개'가 등장합니다. '슴베'는 창촉을 나무 장대에 꽂기 위해 날카로운 부분 반대편에 튀어나오게 만든 부분을 말합니다.  

  정리해볼까요? 구석기에는 이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일단 배가 고프니 사냥과 채집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구가 없어 뗀석기 모양으로 무기를 급조합니다. 그리고 밤에는 일단 잠을 자야 하니 동굴에 머물거나, 막집을 지어 잠을 잡니다. 그런데 구석기 후기에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슴베찌르개 같은 것들도 만들어지더라. 

  

  2. 신석기

   신석기 시대라고 하면, 갈아만든 간석기, 빗금을 친 빗살무늬 토기가 대표적입니다. 구석기 시절에 뗀석기는 울퉁불퉁하고, 간석기는 비교적 맨들맨들해 보이니 조금 더 멋져보인다는 것 외에는 별 의미가 없어보이기도 합니다. 아니, 무기가 좀 나아졌다고 시대가 바뀌는 거란 말인가요?

   구석기로부터 신석기로 바뀌는 이 현상을 학자들은 '신석기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혁명이란 왕조가 바뀌었을 때, 북한 수뇌부에서 자기 자랑할 때, 왕을 끌어내렸을 때 자주 쓰는 말이지요.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거대한 사회변화를 묶어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떠한 거대한 사회변화가 있었기에, '신석기 혁명'이라고 하는 걸까요?

  신석기 혁명의 농경과 정착한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는 것이죠. 농사를 짓는 것은 어쩌면 별 감흥이 없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겨우 씨앗 좀 뿌렸다고 혁명이라고 하는 건 오버하는 것 아니야?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씨를 토지에 뿌려 기른다는 것은 그 작물들을 계속해서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물도 주고, 벌레가 생기면 떼어주고, 다른 집단이 못 가져가도록 지켜야죠. 우리가 만약 신석기 시대로 돌아가, 그 땅을 지키고 계속해서 몇 년, 몇 십년에 걸쳐 농사에 최적화시켜 놓았다고 칩시다. 그런데 웬 다른 집단 사람들이 그곳에 씨를 뿌리고 내 작물이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죠. 우리는 그 사람들을 쫓아내면서 우리는 그 이유를 이렇게 댈 수 있을 겁니다. '우리 땅은 우리 땅이지, 너희 땅이 아니야! 내가 얼마나 공을 들여 놓았는데, 이 도둑놈들아!'

  1년 전인가, '시골 텃세'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나왔습니다. 도시민들이 귀농을 했는데, 시골 사람들이 이 땅은 우리 땅이니 외부에서 온 너희들은 못 쓴다는 사례가 계속해서 있었다는 것이죠. 외지인들은 당연히 억울합니다. 아니, 내가 내 돈 들여서 소유권을 샀는데, 국가 땅을 자기들이 마음대로 개발해놓고 자기들 땅이라네? 국가의 법 질서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근대식 사고에서는 시골텃세는 완전히 불합리합니다. 그렇다면 반대편에서 생각해볼까요? 예를 들어 여러분은 텃밭 동아리를 만들어놓았다고 칩시다. 여러분들은 매 쉬는 시간마다 텃밭이 잘 남아있는지 살펴보고, 점심시간마다 착실히 물도 주고 벌레들도 떼어줬습니다. 그러나 법적으로 그 땅은 학교의 땅이지 학생의 땅은 아닙니다. 교장선생님이 마음대로 학교 차원에서 '그 텃밭에서 상추를 따다가 급식에 사용하라'라고 한다면, 텃밭을 가꾼 입장에서는 화가 나지 않을까요? 이렇듯 '땅'은 노동의 흔적을 쌓아나가는 공간으로, 공동체의식의 매개가 되곤 합니다. 

  하지만 신석기 시대에는 아직 농사 기술도 제대로 된 것이 없습니다. 만약 있더라도 이웃들에게 전달되기는 어려웠겠죠. 선사시대는 말 그대로 역사 앞의 시대이므로, 최소한 남아있는 글자가 없는 시대입니다. 그 만큼 의사소통에 글자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농사 기술도 단지 어른들의 지혜, 연장자의 지혜를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기술이 부족하고 생존 정도만 급급하게 할 수 있으니, 다같이 배가 고픕니다. 지킬 만한 내 재산이 없지요. 그저 우리 공동체에서 밥 먹을 거리를 구하면 서로 배려하여 굶어죽지 않도록 하는 평등사회가 생존에 유리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정착한 곳의 집은 구석기 때의 막집을 짓기보다는, 조금 더 정성스럽게 짓는 것이 나을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땅을 파서 지붕을 올린 움집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물만 잘 빠지게 만들어 놓는다면 비바람과 추위를 피하기 좋은 구조입니다. 그리고 전형적인 신석기 움막의 모양은 위에서 볼 때에는 모서리가 둥글둥글한 사각형 모양입니다. 화덕도 안쪽에 구비되어 있지요. 

  신석기 시대에는 고로 밭을 가꾸기 위해서 딱딱한 흙을 부수는 돌괭이, 땅을 파는 삽 혹은 쟁기 모양의 돌보습, 돌낫 같은 농기구들이 고안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반달돌칼은 청동기 시대 유물로, 아직 신석기 시대에는 대체로 반달돌칼처럼 세련되게 만들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곡물을 수확하면 바닥에 놓는 것보다는 토기에 저장해놓는 것이 더 깨끗하겠죠? 그래서 빗살무늬토기가 고안되었습니다. 왜 빗살무늬인지는 잘은 모르겠습니다. 뉴스에서 봤는데, 누구는 신석기 사람들이 강변과 바닷가에 많이 모여 살아서 생선뼈로 그린 것이라고는 하는데,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생선뼈가 아니라 비가 내리는 형상이라고 하네요. 어쨌건 해석이야 자유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토기가 곡식을 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석기 시기에는 사람들이 바닷가와 강가에 더 모여살게 되니, 모래사장에 꽂기 좋게 토기 바닥을 뾰족하게 만들었다고 이야기하곤 하죠. 물론 설명을 위해서 그렇게 이야기하곤 하나, 100%는 아닐 겁니다. 여러분들의 상상력에 맡겨두도록 할게요.

 이제 신석기 사람들은 이렇게 곡식도 얻고 정착도 했네요. 그렇다면 의식주 중에 '의'만 남았습니다. 옷을 입어야겠네요! 우리의 옷을 보면 아주 촘촘한데, 옷의 실오라기를 보면 꽈배기처럼 돌돌 말려있습니다. 약한 실을 여럿 뭉쳐 돌돌 말아주면 단단해지죠. 그런데 손으로 그 모든 것을 말려면, 너무너무 오래걸릴 것이고, 실도 단단하게 만들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가락바퀴와 뼈바늘입니다. 가락바퀴의 모습을 보면 구멍이 아주 많이 나 있죠. 이 구멍 안에 실을 놓고 뱅글뱅글 돌려주면 단단한 실이 만들어질 겁니다. 그리고 실이 있으면 바늘이 있어야겠죠. 이렇게 만들어진 실은 뼈로 만든 바늘로 꿰는 것입니다. 바늘의 모양은 재료만 동물뼈일 뿐, 요즘 나오는 바늘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단단하게 만든 줄을 이용해서 고기잡이에 쓸 그물도 만들었을 거라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의식주가 모두 해결되어갑니다. 한 지역에 정착한 공동체는 보통 자기들끼리 결혼을 하면서 생존을 했겠죠. 그래서 넓게보아 현 남편과 전 남편, 현처와 전처가 함께 한 공동체에서 지낼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아마 다양한 공동체가 있겠죠. 하지만 크게 보아 하나의 혈연공동체로서 '씨족'이 탄생할 것입니다. 하지만 네 땅, 내 땅이 점점 넓어지고, 우리 송아지도 산책시키고 하다보면 다른 공동체의 사람과 만날 수 있지요. 다른 씨족과의 결합은 혼인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렇게 씨족끼리의 결합을 우리나라에서는 '부족'이라고 지칭하지요. 씨족이든 부족이든 공동체의식과 함께 특유의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데, 정령을 숭배하는 애니미즘, 곰이나 호랑이 등 동식물을 숭배하는 토테미즘, 무당과 주술을 믿는 샤머니즘 등 신앙이 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농경사회라는 것이 신석기에 조성된 것을 보았습니다. 농경사회가 형성된 것이 뭘 그렇게 특이한 것이냐,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한 것에 대해 그리 와닿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를들어, 옛 몽골의 사회와 비교하여 생각해보면 우리는 특수한 문화권 아래에 살고 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신석기까지도 어느 정도 평등사회가 유지되어 있어왔지만, 점차 재산이 많고 적음에 따라, 그리고 토지를 어느 정도 지배할 수 있는지에 따라 신분의 높고 낮음이 점차 갈라져갈 것입니다. 그런 모양새는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서 비로소 드러나게 됩니다.

 

 

  * 참고자료

<<15개정 금성출판사 고등학교 한국사>>

<<2015 수능특강 한국사>>

빗살무늬토기 관련 기사,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5649

 

빗살무늬토기, 과연 기하학적 추상무늬일까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12] 빗살무늬토기의 비밀①

www.ohmynews.com

우리역사넷

반응형

'역사 > 한국 고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옥저, 동예의 상황과 풍습  (0) 2020.11.28
부여의 생활 모습  (0) 2020.11.27
전근대 한국사, 야만적이라고?  (0) 2020.11.26
3. 고조선과 철기 유입  (0) 2020.11.26
2. 청동기 시대  (0) 2020.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