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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역사교육론

[역사교육론 정리노트] 1. 이론(3) - 역사연구사와 역사교육

by 취미와 문화 2020.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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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연구사]

1. 실증주의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고문서 연구학, 연대학, 고문 판독학, 금석학 등 보조과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로써 사료의 외적 비판이 가능해졌기에, 과학적 담론과 문학적 담론이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과학으로서의 역사가 독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과학적 역사학은 민족논리의 근거를 제공하였기에, 민족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적극 활용되었다. 

   그런 풍조 속에 랑케 실증주의가 시작된 것인데, 이는 낭만주의, 실증주의, 역사주의가 혼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랑케는 사료에 대한 검증과 비판을 중시하였는데, 문제는 구조와 법칙에 대해서는 소홀했다. 랑케는 공적 문헌사료를 강조했는데, 그에 적혀있는 정치, 제도사에 중점이 두어졌다. 사료의 일관성을 교차분석을 하여 다른 사료와의 [내적 비판의 방법론]까지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랑케는 역사주의의 영향을 받아 사실의 개별성을 강조하였으며, 사실의 개체성을 주장했다. 역사적 사실은 각각 모두 그 자체로 동등한 가치가 있기에, '사실로 하여금 스스로 발하게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랑케는 '개별적'인 역사를 강조했고, 법칙적인 것을 감히 알려 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과거를 현재의 기준으로 판별해서는 안 되고, 그 자체의 맥락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크로체나 콜링우드 같은 관념론자에 의해 비판받게 된다.

  그런 한편 역사를 객관적으로 다루기 위해 저자 자신을 텍스트에서 지우고, 과거가 어떠했는가를 보여주어야 하며, 과거에 대한 판단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은 여전히 이야기체를 사용했다. 랑케가 말하기를 역사는 [과학이며 동시에 예술]이라고 한 것이다. 수집하고 발견하고 탐구하는 것은 과학이나, 인식한 것을 대중들을 위해 재창조하고 내러티브를 이용해 서술하는 점에서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랑케의 고전 역사 서술의 전제는 투키디데스의 것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이야기식 역사서술이라는 점에서, 분석적인 신실증주의자들에 의해 부정 당하게 된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역사 서술이 과거를 직접 보여줄 수 있다'는 랑케의 기대는 전면적으로 부정당했다.

    랑케 사학으로 말미암아 역사연구로 그치지 않고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과제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교육의 목적이 사실을 통해 교훈을 얻는 것에서, 역사를 아는 것 그 자체로 수렴하게 되었다. 그리고 꼭 법칙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인과관계가 역사서술의 중요 원리라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사료의 가치를 인식했으나, 공적 문헌사료의 가치만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지배층의 역사를 아는 데에만 한정되는 경향이 있었다. 랑케는 국가 권력을 신성시 했고, 교황과 대립하여 이탈리아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는 단초를 제공한 것으로 보이는 루터를 찬양하면서, 독일 민족 역사에 열정을 보였다. 

 

2. 신사학 

  신사학계열에서는 구조, 배경, 법칙성 등을 강조하는 경향을 띠는데, 내이먼사학, 아날사학, 마르크스사학으로 대표된다. 사건 중심의 역사학에서 사회과학적 역사연구와 역사서술로 전환하여 구조사를 주로 표방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회과학적 방법이 채택되는 경향이 있다. 

 1) 마르크스 : 마르크스는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역사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인간의 의식이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이 그의 철학의 핵심이다. 마르크스에 의해 하부구조로서 경제구조가 상부구조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회경제사적 서술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사실 마르크스 본인은 경제적 요소들의 중요성을 고려한 것인 한편, 사회문제의 심각성을 비판한 것으로 경제결정론을 꼭 주장하지는 않았다. 덧붙여서 신사학이라고 한다면, 국내에서도 신라 중심의 삼한정통론을 따르는 근대 국내 최초의 신사체 현채의 <<동국사략>>이 있다. 동국사략은 인과관계에 입각한 근대적 역사서술 방식을 채택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계승한 사학 풍조이다. 마르크스 사학을 이어받는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거칠게 이름을 붙이자면 [구조적 마르크시즘]이 있고, [민중 마르크시즘]이 그것이다. 전자는 마르크스의 구조론을 절대화하여 각 발전단계에 맞추어 역사를 분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후자는 민중의 능동적 참여를 강조하는데, 민중들이 각 합리적 선택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노동운동이 결성되어, 계급의식이 사상과 제도 속의 민중들의 경험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어쨌건 마르크스주의가 역사학에 끼친 영향이란 역사적 사실 아래 '구조'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제시하게 된 것인데, 이 거대 구조를 파악하려는 경향은 훗날 아날학파에게 계승된다.

 2) 아날학파 : 아날학파는 20세기 중반에 대두했다. 이 아날학파는 사건과 개인 중심으로 연구하며 실증을 표방하는 독일의 랑케사학을 비판하는 한편, 마르크스의 구조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형성된 것이다. 훗날 아날학파의 구조사적 개념이 오히려 독일의 사회경제사에 영향을 주었다. 영향은 서로 오고가면서 주는 것이다.

  아날학파는 4세대로 나뉘는데, 뒤르켕과 베르의 영향을 받은 페브르와 블로크는 1세대(블로크의 <<사회경제사연보>>(1929)),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쓴 브로델은 2세대, 심성사의 고오프는 3세대, 신문화사의 4세대이다. 

  기존에 산업혁명은 17~18세기에 일어나는데, 그 현상적인 측면만 보고 18세기 초에만 단기적인 관점에서 연구를 했던 것이 전통적이었다. 그런데 3세대 브로델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15세기의 의식주가 교환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교환경제가 자본주의에 영향을 미친다는 논리를 넣어놓았다. 그래서 산업혁명이 300년 전부터 점점 형성되어 왔다는 것이다. 브로델은 전체사를 지향하여, [장기지속]과 [구조]를 제시하면서 전체사에서 통일성을 부여하였다. 일상적인 물질문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개인보다는 집단, 역사적 인물보다 대중을 신경쓰면서 그 거시적 변화양상을 추적하는 것이 아날학파의 경향이다.

  그리고 주목할 만한 사실은, 아날학파에서는 직선적 시간개념 대신 상이한 문명들 사이에 시간의 복수성을 인정한 것이다. 즉 각 문명마다 다른 시간 속을 살면서 다른 문화를 구성하고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개인보다는 집단, 역사적 인물보다 무명의 대중에 관심을 두면서 사회를 분석했고, 집단의식과 집단적 기억을 분석하는 데에 집중했다. 

 3) 독일 사회사 : 아날학파에 영향을 받아 1960년대에 독일 사회사가 형성되었다. 독일이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경제 발전을 꾀하는 한편 사회문제라는 것이 대두하게 되었고, 그와 함께 국가와 대립되는 사회라는 개념이 정착되었다. 본래 연구 경향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따로 보았는데, 그것들을 통합적으로 통찰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사회경제사가 등장한 것이다. 이로부터 정치적 현상 뿐만 아니라, 그 아래 사회경제적 구조를 파악하려는 경향을 띠게 된다.

 4) 영국 노동사 : 영국 노동사는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전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E.P.톰슨 같은 사람이 있다. 그리고 1960년대에 사회사적 경향을 띠는 케임브리지 학파가 구성되었다.

5) 미국의 역사학 : 미국은 기본적으로 기능주의 역사학을 표방해왔다. 그런데 미국 사회에서 여러 갈등과 모순이 등장하면서 수정주의도 대두하게 되었다. 미국도 사회과학의 개념과 방법을 도입할 것을 주장했으나, 2차세계대전 이후로는 합의사학이 통합 또는 합의의 관점에서 미국 역사를 보는 민족주의적 사관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미국 사회에 갈등과 모순에 문제의식을 가진 수정주의가 등장하게 되고, 1960년대에 계량경제학의 이론과 방법을 경제사 연구에 적용한 신경제사가 등장했다. 신경제사는 소위 [반사실적(counterfactual) 분석]을 시도하기도 했는데,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에서 어떤 조건이 결여되었을 경우를 가정하여 실제와 비교하는 것이다. 

  프랑스 아날학파, 독일과 영국의 사회사, 미국의 신경제사 등 사회과학적 역사학은 전통적 역사서술이 개인의 행위와 의도에 사건의 초점을 맞추었던 것과는 달리, 더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맥락과 사회구조]를 주로 연구했다. 그렇게 사회변혁의 과정을 포착하여 역사학의 조망을 [정치에서 사회]로 확장하였다. 그러나 사회과학적 역사학은 [근대세계의 본질과 방향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고, 서구의 우월한 지위 선점을 지지]하였다.

 

3. 신실증주의

  실증주의는 후에 신실증주의로 계승된다. 그 대표자는 포퍼와 헴펠인데, 랑케의 실증주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했다. 이 신실증주의자들은 역사에 자연과학적인 방법을 도입하려 했고, 랑케가 개별적인 사실을 다룬 것과는 달리 이들은 일반적 법칙성을 찾으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환경과 외면에 더욱 집중하였다.

 

4. 현재주의 역사학 - 관념론자들

  20세기 역사학에서는 이미 랑케식 문헌고증을 가치중립적으로 보고있지 않았다. 물론 랑케의 역사 사료 비판에 대해서는 여전히 인정을 하고 있지만, 과거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감을 품었다.

  한편 19세기 중반 20세기 초에는 신실증주의에 반발하여 관념론이 등장했다. 크로체와 콜링우드는 포퍼와 헴펠의 보편법칙적 역사에 반대했던 이들이다. 크로체와 콜링우드는 내면적인 사상의 역사를 연구할 것을 강조했다. 물론 이렇게 도식화하긴 했지만, 이들도 객관적 사실을 강조하나 내면에 다시 강조점을 두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1) 크로체 :  크로체는 (역사가의) 사상의 역사를 강조함으로써, 모든 역사는 역사가의 현대적 사상에 의해 해석되므로 현대사라는 입장이다. 고로 과거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려고 하는 랑케의 연대기적 역사란 이들의 입장에서는 '죽은 역사'이다. 역사는 역사가의 현재적 관점에서 쓰인 현재적 역사이기 때문이다. 생의 현재적 관심으로 정신의 인식 대상이 된 것이어야 '살아있는 역사인 것'이다. 

  크로체는 역사연구의 목적과 방법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하면서, 자연과학적이지 않고 철학적이라고 했다. 크로체에게 있어서 역사학의 목적이란 '인간 정신의 이해'라는 것이다. 크로체에게 역사학이 인간정신을 다루는 학문이므로, 모든 학문은 인간정신의 발전을 연구하는 것이므로, 역사학의 일부분이다. 

  2) 콜링우드 : 콜링우드 역시 '사상의 역사'를 강조했으나, 역사적 행위자의 사상의 역사를 강조한 것으로, 크로체와는 조금 다르다. 그리고 역사는 질문과 대답의 원리이며,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는 것이 크로체와 유사해보인다. 그러나 콜링우드는 현재의 역사는 [역사가가 과거의 사상을 재현할 때에 현재의 사상과 경험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며, 크로체는 [역사가가 처해있는 상황으로서, 역사적 과제가 부여된 현재]라는 뜻이므로 서로 다르다. 콜링우드는 사상을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세 가지 절차를 제시했다. [과거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이 왜 일어났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무엇이 일어났고 왜 일어났는지 아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을까?] 즉, 사실 - 동기 - 현재성에 대해 아는 것이다.

  콜링우드는 다른 학문과 구별되는 역사이해의 고유성을 강조하였는데, 과학이 자연을 연구하는 데 비해 역사적 사건은 인간의 행위 그 자체가 연구 대상이라는 것이다. 특히 인간 행위는 외면은 물론 [내면]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사가는 행위자의 내면까지 연구해야 한다. 콜링우드는 행위자의 내면이 [사고(Thought)]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이 사고란 과거 행위자의 사고, 역사가의 사고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즉, 역사적 행위자의 사고를 현재 역사가가 사고함으로써 연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일차적으로 사료를 통해 알 수는 있다. 그러나 사료는 부족하므로 우리는 상상을 해서 그 부족한 부분을 추리해내야 한다. 그런데 그 부족한 부분을 이미 사료가 없어도 선험적으로 아는 경우가 있다. 그것을 콜링우드는 [선험적 상상]이라고 한다. 이런 것이 훗날 '보간'이나 '삽입'이라는 개념으로 계승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역사는 역사가가 마음 속에서 과거행위자의 사상을 [재사고]하며, 그 행위 주체의 동기, 심리, 목적 등 참다운 목적을 이해하는 것을 통칭하는 [재연]을 통해 내면을 파악하는 것이다. 즉, 재연은 역사적 행위를 상상적으로 재구성하고 인식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재연을 함으로써 도달해야 하는 '역사적 가치'란 무엇인가. 결국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재연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먼저 역사 자료를 해석하고, 역사적 행위자의 동기나 목적을 인식한다. 그리고 역사적 행위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역사적 행위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재연은 교수학습방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역사가의 태도이자 연구방법인 것이다.  

 3) 제임스 로빈슨 : 역사가의 역사인식의 기점은 현재이며, 역사 서술의 출발점은 역사가의 현재인식이라고 보았다. 그는 역사가의 인식 밖에 있는 역사적 사실이란 없다.

4) 카를 베커 : 카를 베커에 따르면 역사가가 자신의 환경을 떠나 과거를 인식할 수 없다. 이야기를 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은 역사가이며, 역사가가 역사적 사실을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이야기를 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은 바로 역사가이며, 역사가가 역사적 사실을 만들어낸다. 그에 따르면 역사란 궁극적으로 현재 사람들이 그들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이야기이므로, 모든 사람은 각자가 제 나름의 역사가인 것이다.  고로 객관적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5)  카 : 역사가는 과거를 마음대로 편집해서는 안 되지만, 과거 그 자체를 그대로 드러낼 수도 있는 것도 아니다. 과거 사실의 중요성을 판단하여 역사상의 사실이 되게 만드는 주체는 역사가이다. 하지만 그는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도 경계하는 한편, 그는 과거 사실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랑케를 비판했다. 역사가란 사실의 노예도 아니고 억압적인 주인도 아니라고 했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 과정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즉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 사회를 이해시키고 현재 사회에 대한 그의 지배를 증신지키는 것이 역사의 이중적 기능이라는 것이다. 

 

5. 포스트모던 : 20세기 들어서는 포스트모던 사학이 등장하였는데, 그 안에는 텍스트론적 역사방법과 신문화사가 있다. 텍스트론은 본래 역사학이 아니며 포스트모더니즘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신문화사는 어느 정도 역사의 실재성을 인정한다. 랑케 이후 진실에 대한 3가지 기본전제, 즉 [과거의 실제에 대한 진실을 탐구하고, 엄격한 사료비판으로 객관적 역사서술을 추구하고, 역사설명에 있어서 계기적 인과성과 기원을 탐구하는 것]이 있었다. 사실 실제에 대한 진실을 탐구하려면 엄격한 사료비판을 해야 하며, 진실을 탐구하는 과정에서는 사료 속 사건들의 계기적 인과성과 기원을 밝혀내는 과정이 뒷받침되어야 하므로, 세 가지 전제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것들은 언어를 통해 서술되어야 한다.

  그런데 언어 서술의 진실성에 회의를 갖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두 가지의 전제조건이 있다. 어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실을 탐구하는 것, 즉 보편역사를 지향한다는 역사연구의 목적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엄격한 사료비판을 통해 객관적인 서술이 가능하겠는가에 대한 방법론적 회의이다. 결국 텍스트인 사료는 복합성, 모호성, 다의성, 주관성을 띠기에 역사는 담론이라는 것인데, 역사학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편집하는 것을 담론이라고 한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 단위에서 담론이란, 언어에 권력의 의지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설명에 있어서 계기적 인과관계나 기원에 대한 탐구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에 여러가지 출발점이 발굴될 수 있으며 불연속적인 것들이 혼합되어 나타난 우연적인 현실이라는 주장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통상 역사는 맥락에서 만들어지므로, 그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그것마저 비판하여, 역사적 텍스트가 역사적 맥락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역사를 쓰고 읽는 작업이 역사적 상황을 만드는 것이며, 역사적 담론이라는 허구적인 것이 역사적 의미를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는 역사가가 제시하는 텍스트를 읽으며 저자의 의도에 빨려들어가지 않는 [해체적 읽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6. 신문화사 : 신문화사는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문화는 존재하는 의미가 있다는 맥락에서 기능주의적인 경향을 띤다. 또한 미시사적인 접근을 했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일부 받기도 했다. 그러나 텍스트론과는 달리 역사적 실재를 인정하며, 역사연구라는 행위를 역사적 발명이 아닌 '발견'을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인간과 구조를 구분하는 논리를 비판하면서, 역사적 객관적 요소와 주관적 요소를 극복하였는데, 발리섬 닭싸움 연구로 대표되는 인류학적 방법론을 선택한 기어츠가 그 사례이다. '어떻게 살았는가'라는 관심으로부터 더 나아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역사적 사실을 주체적으로 읽고 해석하면서도 역사적 실재를 포착하려 했다. 그렇게 접근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생산된 사료가 어떤 의미를 띠고 있는지 [치밀한(thick) 묘사]를 통해 나타낼 수 있다. 이로써 역사적 (발명이 아닌) 발견을 할 수 있다.

  이 신문화사는 한국 역사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옛 계급 투쟁의 문화사를 찾으려 했던 것과는 달리, 일상문화에서 역사적 요소를 파악하여 그 사회에서 맥락을 파악하려 했다. 역사교육에서 신문화사를 바라볼 때에도, 거창한 구조사로부터 벗어나 다양하고 사소한 주제들을 이용할 수 있으며, 거창한 역사적 구조가 아니라 상세한 역사적 사건이 역사교육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시사점이 있다. 민중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묵재일기, 미암일기 같은 일기자료가 새로 역사학계에서 주목받는 것이 그 사조의 영향일 것이다. 그런 한편, 신문화사는 역사적 객관성을 어느정도는 부정해왔다. 그 점을 받아들여 역사 교과서 역시 성전이 아니라 하나의 자료로 인식해야 한다는 태도로 계승할 수 있겠다. 물론 기능론적인 통합을 은연중에 강조하며, 국지적 현상에 관심을 두어 구조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보완이 필요하다. 또한 문화현상 속에 역사를 규명했으나, 역사 속에서 문화의 '변화'에 주목하지 못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국내의 역사학 교육과정]

해방 이후 교수요목기 시기에는 각지에서 한글 및 국사교육을 위한 강습회가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진단학회가 간행한 <<국사교본>>이 널리 사용되었는데, 국사교육은 유구한 민족사 전통을 강조하기 위해 단군이래의 고대사를 강조했고, 민족문화를 고취하는 정치사 중심이었다. 그래서 당시 고대사가 60% 가량 비중을 차지했다.

그런데 군정기를 거치며 역사과목은 사회생활과에 속하게 되었고 역사교육은 초5~6학년부터 실시되었다. 중고등학교에서도 [우리나라생활(한국사), 이웃나라생활(동양사), 먼나라의 생활(서양사)] 혹은 [우리문화사, 인류문화사]를 배웠다. 여전히 민족의 자긍심 회복을 위해 고대사가 강조되었다.

 

 

* 참고자료

북소년 선생님

양호환 외 4명, <<역사교육의 이론>>, 책과 함께,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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